올해 팔순인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은 참 건강해 보였다. (건강) 비결을 물어보니 “열심히 일하다보면 저절로 건강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로와 스트레스 탓에 건강을 잃어가고 있는 직장인들은 귀를 쫑긋할 것 같다. 김 회장이 다음 말을 덧붙이자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정신과 몸의 밸런스를 맞추면서 부지런히 움직이면 건강해진다는 얘기야.”

이번 주 맛있는 만남의 장소는 김 회장의 30년 단골집이라는 서울 삼선교의 ‘국시집’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도 종종 찾았다는 곳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일까. 김 회장을 만난 날 다른 방에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오찬을 하러 들렀다는 소식이 들렸다. 막걸리 잔이 채워지자 김 회장이 수육을 권한다. “이거 잡숴봐. 어서들 잡숴. 맛있죠?” 무생채, 파김치를 곁들여 먹으라면서 연신 접시를 취재진 쪽으로 밀어줬다.

6·25전쟁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1957년 10월, 서울 종로5가 한구석에서 생겨난 보령약국. 김 회장이 고향의 이름을 따 지은 이 약국이 보령제약그룹의 모태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국식 약국은 보령약국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령제약그룹은 고혈압 치료제 신약 ‘카나브’를 개발,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회장님이 오셔서인지 오늘 고위급 인사들이 많이 왔나 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두산가와 인연이 있어요. 20대 후반 약국할 때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이 약을 사러 자주 찾으셨어요. 당시 두산상회가 약국 근처에 있었으니까. 이정재 씨도 오곤 했어요. (폭력배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인자한 면이 많았던 분이야. 그때 그분이 유지광, 임화수 씨 이런 분들과 함께 지프차 타고 왔어요. 중절모자 쓰고. 가끔 약국에 주먹들이 와서 좀 못살게 굴었는데, 한번은 이정재 씨가 오셨길래 인사하러 달려나갔지요. 손님이니까. 마침 ‘어려운 거 없냐’고 물어보길래 ‘사실 좀 힘든 일이 있다’며 사정을 설명하니까 그날로 괴롭히던 사람들이 형님 하며 달려와 사과했어요. 1958년이었나. 오래된 얘기야. 재밌죠?”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입니다. 창사 50주년을 맞았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약은 뭔가요.

“용각산이 기억에 많이 남죠. 140여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본 전통 생약입니다. 서양의학과 전통 약이 절묘하게 만난 건데 바로 제가 찾던 약이었죠. 1965년 말부터 류카쿠산사에 기술 협조를 요청했는데, 통할 리가 없었지요. 자본금과 매출액, 생산설비 등 상세 자료를 요청하는데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직접 찾아가고, 매일 우체국에 가서 담당자와 임원한테 전화하고. 전화를 안 받으면 비서한테 ‘한국에서 용각산 만들 보령제약 김승호 사장’이라고 계속 메시지를 남겼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한 반 년 정도 그러고 나니 반응이 왔습니다. 1966년 중순에 류카쿠산사에서 당시 스기야마 부사장이 실사를 하겠다고 방한했어요. 공항에 달려가 이분들을 차에 태우고 지어지지도 않은 성수동 공장부지로 향했죠. 그리고 허허벌판에 대고 ‘보세요. 첨단설비 공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용각산이 한국에서 성공할 것이라 믿는 사람에게만 공장이 보일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정식 기술제휴 계약을 맺었죠.”

▷약가 인하로 제약사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의약분업이 가장 성공한 국가 중 하나입니다. 국민들이 받고 있는 의료 혜택도 세계 최상위 수준이에요. 의약분업을 한 나라는 어차피 약가 인하가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감당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값을 좀 단계적으로 깎아야 되는데 한꺼번에 해버리니 난리가 난 거죠. 하지만 극복해야 합니다. 길은 하나, 연구·개발(R&D)로 가야 합니다. 한 30군데 정도가 신약개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 같은데, 혁신형 제약기업 선정도 있고 하니 정부하고 대화해서 잘 같이 가야지요.”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잔이 비면 바로 막걸리를 따라주는 김 회장. 대구전을 간장에 찍어 취재진 접시에 올려줬다. 어떤 술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다. “맥주 소주 막걸리, 다 잘 먹어.” 김 회장의 하루는 오전 5시 반~6시에 시작된다. 30분 동안 간단하게 운동하고, 약간의 식사 후 집을 나선다. 항상 밤 12시께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카나브에 대해 기대가 많으시죠.

“얼마 전 멕시코 출장 가서 의사들한테 프레젠테이션했는데 반응이 좋아요. 브라질도 지금 직원들 가 있고, 중국 터키도 마찬가지고. 카나브는 ARB(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 계열 고혈압약인데, 혈압 컨트롤이 아주 잘 돼요. 세계 고혈압약 시장이 1조5000억원인데, 그중 절반이 ARB 계열이에요. 이 중 10%만 가져가도 750억원인데, 일단 이게 목표입니다.”

▷직원들 자부심이 높겠습니다.

“그럼요. 신약개발해서 외국 나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겁니다. 남미 13개 국가와 공급 계약을 맺었는데, 정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있는 거죠. 회사 분위기가 많이 고양됐어요. 공부도 엄청나게 하고 있는 거죠. 임상으로 효과에 대한 에비던스(증거)를 계속 만들어가야 하는 거니까. 또 국제규격에 맞아야 하고. 이것들이 한박자로 가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약과 바이오가 함께 가야 할 텐데, 줄기세포나 제대혈 등은 어떻게 보십니까.

“보령바이오파마가 그쪽으로 내실을 다져가고 있어요. 제대혈 저장고도 두고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별도 공장을 지을 겁니다. 줄기세포는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참 완벽한 것이기 때문에 잘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시밀러도 요새 대기업들이 뛰어드는데, 괜찮은 현상입니다. 결국 지향해야 할 부분은 바이오 의약품이니까요.”

대화 중에 못 보던 특별 메뉴가 상에 올랐다. 조기구이다. 동석한 회사 관계자가 “우리끼리 올 때는 한 번도 못 보던 특별 요리가 회장님이 오시니까 나오네”라며 웃었다.

▷드시는 약은 없나요.

“혈압약 하나 먹고 일절 안 먹어. 먹은 지 한 5~6년 됐는데 최근 카나브로 바꿨어요. 난 약 먹으란 소리 안 해. 약 안 먹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반세기를 제약산업에 투신한 김승호 회장의 조언, ‘약을 먹지 말라’.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정적이 흐르다 이내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회공헌활동을 많이 하십니다. 보령의료봉사상 등도 제정하셨는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고 이태석 신부님도 이 상을 탔지요.

“그때 아프리카 수단에 계셔서 신부님 어머님께서 대신 받으셨어요. 젖꼭지를 물지 못하는 구순구개열 아기들을 위한 특수 젖꼭지를 무료로 배포하는 사업도 18년째 계속 중이고, 소아 백혈병 환자, 투석 환자 지원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

▷보령제약은 기업이미지가 건실합니다. 회장님의 그런 마인드가 50년간 쌓인 결과겠죠.

“약국 처음 개업했는데 세 평 반인가 그랬지요. 지금은 이렇게 커졌지만 당시에는 도매상 말고는 약국이 없었어요. 다들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구색도 없고. 그래서 난 구색을 갖춘 약국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또 그 사람들(도매상)은 불친절했지. 아까 말한 이정재 씨뿐 아니라 누구한테나 90도로 인사를 했어요. 가능한 한 가장 싸게 팔고. 가장 친절하게. 그리고 원하는 약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구해주고. 그게 바로 보령약국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다하는 겁니다.”

마지막 메뉴 국시가 나왔다. 후루룩거리는 소리 뒤로 김 회장이 “너무 짜게 먹진 마. 이건 담백하게 먹어야 돼”라고 말했다. 양념장을 너무 많이 넣지 말란 얘기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 어쩌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대단히 똑똑합니다. 사람의 역량이라는 게 끝없이 진화합니다. 끝이 있다면 인류가 망하겠죠.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논리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면 안 됩니다. 다만 신문 보면 거기서 얻는 지식이 정말 대단한데, 너무 인터넷만 하지 말고 책이나 신문도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 기질이 굉장히 저돌적인데, 이건 큰 장점입니다. 그런데 신뢰와 정직 등 자질을 좀 더 쌓을 필요가 있어요. 예전 새마을운동이 잘살아보자였다면, 도덕성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려 국민 체질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제2 새마을운동’이라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후식은 오렌지다. “내가 별로 멋이 없는 사람인데…. 안식구가 떠난 지 이제 6년 됐어요. 한 달에 한 번 산소에 가는데, 뭐 떠난 사람이 알겠냐만.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가요. 그래야 내가 편해.” 인터뷰는 짠하게 끝났다.


◆ 김승호 회장 단골집 국시집 - 안동식 칼국수 원조…YS도 즐겨찾아

작은 나무판에 새겨진 간판이 이 집을 알리는 전부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간판이지만 평일 낮에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혹시 재료가 다 떨어지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안동식 칼국수의 모태 격인 ‘국시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9년 문을 연 이 집은 당시 창업자의 딸이 이어받아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1층은 테이블과 방이 함께 있고 2층은 방이다.

메뉴는 소고기 수육, 문어 숙회, 생선전, 칼국수다. 문어 숙회는 너무 퍼지지도, 딱딱하지도 않게 삶아내는 게 관건. 40년 동안 이어진 비법이다. 소고기 양지와 사태로 만든 수육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우면서 씹을수록 느껴지는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함께 나오는 양파 고추절임과 함께 먹으면 제격이다.

칼국수는 전통 경상도식이다. 면, 고기 약간, 애호박 약간 등이 재료의 전부다. 화학조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국수 면도 손으로 직접 만든다. 보들보들한 면발과 진한 사골육수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숙회와 수육은 2만5000원, 대구전은 2만원, 칼국수는 8000원. (02)762-1924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