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으면 이사회를 점령하라.”

금융회사와 대기업의 탐욕을 비판하며 지난해 시작된 월가 점령 시위가 주주들의 ‘이사회 점령(occupy boardroom) 시위’로 진화하고 있다. 주주들이 최고경영자(CEO)의 연봉 인상, 부적절한 인사의 이사 선임 등에 반대하며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것. 월가 점령 시위와 다른 점은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 장기 투자자들이 주주총회에서 합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회 점령 시위의 주요 타깃은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금융회사들이다. 씨티그룹 주주들은 지난주 비크람 판디트 CEO의 1500만달러 연봉 승인안에 55%가 반대표를 던졌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지난해 주가가 44%나 하락한 씨티그룹의 경영진을 압박하기에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미국 1위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도 주주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요구다. 미국 최대 노조 상급단체 중 하나인 지방공무원노조연맹(AFSCME)은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 CEO(사진)가 이사회 의장직을 겸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두 직책을 분리하는 방안을 이사회에 상정했다.

골드만삭스는 블랭크페인 CEO가 겸임을 유지하는 대신 사외이사 중 한 명을 선임이사로 지명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선임이사는 이사회 의장이 없을 때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골드만삭스는 또 최근 세쿼이아펀드로부터 제임스 존슨 이사(전 패니메이 CEO)를 재선임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받기도 했다. 존슨 이사가 패니메이에 재직하던 1990년대 지배구조 변경에 반대하다 결국 부동산 버블을 초래했기 때문에 골드만삭스 이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대기업들도 거세지는 주주들의 목소리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 주주들은 서면 동의만으로 경영상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주주 제안을 상정했다.

특별 주주총회를 소집하지 않더라도 주주들이 회사와 관련된 주요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이 안건은 전체 주주 중 47.5%의 동의를 얻었다. 비록 안건이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경영진으로서는 사실상 경영권을 주주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주주총회장 앞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도열해 주주들에게 힘을 보태기도 했다.투자회사 CLSA의 마이크 메이요 애널리스트는 “힘의 균형추가 주주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