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년 前 국민투표…세종시대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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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기존 토지 과세 문제 많아…새로운 세법 '貢法' 마련
양반 등 기득권 거센 반발 "백성이 좋지 않다면 포기"
여론조사 '승부수' 던져…5개월간 17만여명 참여
기존 토지 과세 문제 많아…새로운 세법 '貢法' 마련
양반 등 기득권 거센 반발 "백성이 좋지 않다면 포기"
여론조사 '승부수' 던져…5개월간 17만여명 참여
총선 공약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세금 문제다. 최근에는 소득세 과세 기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데 어느 시대이건 세금은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580여년 전 세종 시대에도 과세 기준에 대한 고민이 컸다.
조선시대는 토지에 부여하는 세금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고 해서 풍흉을 직접 조사해 세금을 매기는 방식을 취했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위관(委官)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했다. 공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해 일정 비율로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문과(文科) 책문(策問)의 제(題)를 공법(貢法)으로 했다. 공법 시행에 앞서 재능 있는 선비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 3월16일 기록이 이렇게 돼 있다.
‘전제(田制)의 법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후씨(夏后氏)는 공법으로 하고, 은인(殷人)은 조법(助法)으로 하고, 주인(周人)은 철법(徹法)으로 한 것이 겨우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데, 삼대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토지 제도는 해마다 조신(朝臣)을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해 적중(適中)을 얻기를 기했다.’
《세종실록》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조법(助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행한 후에야 시행되므로, 역대의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시행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고원과 습지가 꼬불꼬불해 시행되지 못할 것이 명백했다. 공법은 하나라의 책에 기재돼 있고, 비록 주나라에서도 또한 조법이 있어서 향(鄕)과 수(遂)에는 공법을 사용했다고 하나, 다만 그것이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해 일정한 것을 삼음으로써 좋지 못했다고 이르는데,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런 다음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한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田制)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며, 유자(有子)는 말하기를 ‘백성이 유족(裕足)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들은 경술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해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해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했다.’
세종은 공법 결정 이전에 과거 시험에 관련 내용을 출제함으로써 공법 제정 문제가 조정의 현안임을 강조하는 한편, 시행 이전에 분위기를 미리 조성하고자 했다. 신하와 유생들의 의견을 알아본 후에 최종적으로 공법의 시행은 백성이 결정할 사안으로 판단했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3월5일부터 8월10일까지 5개월간 실시했다. 치밀한 성품과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세종 12년 3월5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호조 판서 안순(安純)이 아뢰기를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본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찾아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해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관리들로 하여금 깊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위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천명한 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이 찬성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는 세종의 선언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국민투표에는 17만여명이 참여했고 9만657명이 찬성, 7만4148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찬반 상황을 지역별로 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국가의 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여명의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거의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로 여론조사가 불가했던 그 시절에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투표에 참석하도록 한 점은 매우 눈길을 끈다. 관리들이 집집마다 백성을 찾아가며 의견을 물었을 가능성이 큰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큰 사업이었다. ‘민본’과 ‘민주적 절차’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세종의 의지는 580년 전의 국민투표를 가능하게 했고, 그 성과물인 공법은 세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토지에 부여하는 세금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고 해서 풍흉을 직접 조사해 세금을 매기는 방식을 취했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위관(委官)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했다. 공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해 일정 비율로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문과(文科) 책문(策問)의 제(題)를 공법(貢法)으로 했다. 공법 시행에 앞서 재능 있는 선비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 3월16일 기록이 이렇게 돼 있다.
‘전제(田制)의 법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후씨(夏后氏)는 공법으로 하고, 은인(殷人)은 조법(助法)으로 하고, 주인(周人)은 철법(徹法)으로 한 것이 겨우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데, 삼대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토지 제도는 해마다 조신(朝臣)을 뽑아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손실을 실지로 조사해 적중(適中)을 얻기를 기했다.’
《세종실록》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조법(助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행한 후에야 시행되므로, 역대의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시행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고원과 습지가 꼬불꼬불해 시행되지 못할 것이 명백했다. 공법은 하나라의 책에 기재돼 있고, 비록 주나라에서도 또한 조법이 있어서 향(鄕)과 수(遂)에는 공법을 사용했다고 하나, 다만 그것이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해 일정한 것을 삼음으로써 좋지 못했다고 이르는데,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런 다음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한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田制)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며, 유자(有子)는 말하기를 ‘백성이 유족(裕足)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들은 경술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해 익혔을 것이니, 모두 진술해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했다.’
세종은 공법 결정 이전에 과거 시험에 관련 내용을 출제함으로써 공법 제정 문제가 조정의 현안임을 강조하는 한편, 시행 이전에 분위기를 미리 조성하고자 했다. 신하와 유생들의 의견을 알아본 후에 최종적으로 공법의 시행은 백성이 결정할 사안으로 판단했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3월5일부터 8월10일까지 5개월간 실시했다. 치밀한 성품과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세종 12년 3월5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호조 판서 안순(安純)이 아뢰기를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본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찾아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해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그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관리들로 하여금 깊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위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천명한 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이 찬성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는 세종의 선언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국민투표에는 17만여명이 참여했고 9만657명이 찬성, 7만4148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찬반 상황을 지역별로 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국가의 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여명의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거의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로 여론조사가 불가했던 그 시절에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투표에 참석하도록 한 점은 매우 눈길을 끈다. 관리들이 집집마다 백성을 찾아가며 의견을 물었을 가능성이 큰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큰 사업이었다. ‘민본’과 ‘민주적 절차’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세종의 의지는 580년 전의 국민투표를 가능하게 했고, 그 성과물인 공법은 세종 시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