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공짜 초콜릿에 관한 연구
“투표권이 일곱 살짜리 아동에게까지 확대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정부가 일곱 살짜리 아이들에 의해 운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 감자튀김, 공짜 레모네이드, 혹은 비디오에 대해 충분하고 평등하게 접근하려는 아이들의 합법적 관심이 정책에 반영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런 말로 대중 민주주의를 이죽거린 사람은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라는 책을 쓴 한스헤르만 호페다. ‘충분하고, 평등하게, 합법적인’ 등의 단어들에서 골계 미학이 넘쳐난다. 호페는 무제한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맹신을 비판한다. 민주주의가 소유권을 파괴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사실 무제한적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는 프랑스 혁명이 기필코 군사독재로 귀착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유명한 에드먼트 버크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버크의 예언대로 열광적인 대중 민주주의가 실패한 자리에서 군인 나폴레옹이 몸을 일으켰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파국으로 끝난 자리에서 독재자 히틀러가 태어났다.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의 전개는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재난 가능성에 대해 ‘거의 모든 교과서들이 우려했던 거의 모든 문제’를 집대성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고대녀 해적녀 소동은 그 중 작은 사례다. 원래 ‘진보’라는 말은 ‘어린애 같은’ 혹은 ‘위선적인’이라는 뜻을 어느 정도는 내포하고 있다. 순수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무지하다는 함축일 수도 있다. 해적녀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들이 진보정당의 비례대표로 이름을 올린 일만 해도 그렇다.

정치를 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들이 지역구도 아니고 비례대표부터 하고 싶다니 또래의 젊은이들도 웃을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반값 등록금이라는 값싼 투쟁으로 얻어낸 값비싼 비례대표들이다. 젊은이들이 왜들 이러시냐고 묻고 싶지만 이들 중 몇은 한 달 후면 국회의원 똥배지를 달고 입법권을 휘두르게 될 터이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세금을 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일수록 곧잘 로빈후드 놀이를 해보겠다는 소영웅주의적 유혹에 노출된다. 그렇게 좌익의 논리와 아이들의 권리 목록이 넘쳐나고 있다. 공짜 감자튀김에, 공짜 레모네이드에, 엄마의 간섭 없이 게임을 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들과 다를 바 없는 목록들이 어제는 새누리당에서, 그리고 오늘은 민주당에서 총선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미 학생인권 같은 치기어린 이념 놀이가 횡행하고 있는 마당이다. 2040의 반란표나 소녀적 이미지의 안철수로부터 정치권 전체가 일격을 맞은 후유증일 것이다. 정신을 차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덜 지난 것이 틀림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소수의 횡포, 내지는 다수결의 역설 같은 정치 공학적 상황이 구조화하고 있는 점이다. 오로지 한 표만 더 얻으면 이긴다는 논리는 이념도 철학도 없는 무차별적 연대를 만들어냈다. 조전혁을 낙천시킨 새누리의 이념 훼절도 그렇지만 진보와의 연대를 명분으로 한·미 FTA 폐기를 외치거나 강정마을에서의 반국가 투쟁에 동참하고 있는 민주당도 타락의 길을 걷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매표(買票) 혹은 정치적 뇌물을 제공하는 행위는 이렇게 스스로를 타락시킨다. 진보 정당이 비례대표를 젊은이들에게 할당하고 있는 것도 실은 대학생 운동권에 던지는 뇌물이다. 그렇게 정치꾼의 한 표는 턱없는 권력을 얻어 챙긴다.

다수결의 역설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저질화의 길을 걷는다. 복지 논쟁도 만찬가지다. 공짜를 요구하는 소수가 다수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면 선거는 갈수록 공짜 알사탕 같은 복지목록을 늘리게 된다. 세종시 같은 것도 그렇게 외곽 지대에서 태어났다. 세종시를 만들어 냈던 음습한 거래의 논리가 거의 모든 국정과제로 확산된 것이 지금의 선거판이다.

동반성장도 그룹별 이권창출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종북주의나 나꼼수 같은 어둠의 정치 컬트로까지 확산되었다. 반(反)지성이 지성을 조롱하고, 가짜가 진짜를 침탈하며, 허위가 진실을 가리고, 선동이 정론과 동일시되는 그런 민주주의 실종 상태다. 공짜 알사탕을 달라는 철부지들의 민주주의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