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 씨 "보리밭 누드요? 여성 편견에 대한 도전이죠"
2~3m 대형 화면 속에서 툭툭 불거진 보리이삭 사이로 드러누운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몸매에 보리밭이 꿈틀거린다. 여인의 몸매는 요염하면서도 풍만하다. 칠순의 여성 화가가 그린 그림이지만 관능적인 곡선과 울룩불룩한 질감에서 힘이 넘쳐난다.

보리밭과 관능적인 여체를 결합해 향토적 에로티시즘 미학을 추구하는 이숙자 씨(70). 그의 생동적인 필력과 채색미가 상상 속의 화의(畵意)를 더욱 충만하게 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9일부터 내달 1일까지 펼쳐지는 회고전은 40여년간 한국화의 변용을 실험해온 한 작가의 예술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육체적인 관능보다 전통적인 시각의 여체에 주목한다. 청청한 보리밭 속의 누드는 성(性)으로서의 여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보리밭 에로티시즘’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보리밭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한(恨)의 정서, 강인한 생명력 등 다양한 미적 요소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로부터 농촌의 초여름 보리밭은 사랑의 장소가 되기도 했지요. 애정소설에도 그런 얘기가 자주 등장하죠. 흥미로운 민담을 에로티시즘으로 형상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시동생의 하숙집을 찾아가던 길에 만난 보리밭에서 영감을 얻어 1970년대 중반부터 40여년간 작업해온 그는 1989년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로 화단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당시 알몸의 여성도 얘깃거리였지만 체모가 그대로 드러나 더욱 화제를 모았다.

그에게 보리밭과 여체는 에로티시즘을 토속적인 정서와 연관시켜 한국 여인상의 풍정을 되살려내기 위한 수단이다. “저에게 ‘이브’는 내면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모든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인습에 저항하는 여성상, 그것이 화면 속의 이브로 나타난 것이죠.”

그는 “단순히 여인의 피부나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한국 여성으로서의 누드, 즉 삶의 현장에서 투철하게 살아가는 희망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벌거벗은 여인이 1980~1990년대 여성 해방의 기수이자 혁명적 투사로 읽혀진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림 속의 여인은 자연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리 이삭이나 꽃들과 함께 대지에서 다시 태어난다.

11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던 그는 “보리밭을 처음 봤을 때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과 민족의 혼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보리밭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우리 채색화를 살릴 수 있었죠.”

그는 보리밭을 한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한’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여체를 등장시킴으로써 한과 생명력의 조화를 이뤄내고 한국적인 삶의 풍경과 정서를 접목시킨 것. 그의 예술이 보리밭 속에서 움트기 시작해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은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보리 낟알 하나하나를 통해 감각적으로 드러낸 ‘보리밭’ 시리즈를 비롯해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 최근작 누드화 ‘이브’, 인물화, 크로키 등 70여점을 걸었다.

서울 전시가 끝나면 가나아트 부산지점으로 장소를 옮겨 내달 17일까지 이어간다.(02)72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