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진관사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5시였어요. 인기척을 느낀 개가 짖고 스님들도 우릴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장공비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어요. 저녁 7시까지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죠.”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 김신조 목사. 31명의 무장공비 중 유일하게 생포된 그가 고려아연 직원들 앞에 섰다. 44년 전 서슴없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말했던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30사단(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은 ‘1사 1병영’ 운동의 일환으로 자매결연 기업인 고려아연 직원들과 함께 지난달 22일 ‘김신조 루트’ 탐방 행사를 가졌다. 30사단은 1·21사태 당시 그를 생포했던 부대다.

김신조 루트는 경기 연천군 매현리에서 서울 청운동까지 청와대로 침투한 길로 지난해 공개됐다. 이날 탐방코스는 진관사~30사단 휴게소~유격장~우이령길 순으로 세 시간가량 진행됐다.

김 목사는 칠순의 나이(71)에도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그날의 일도 또렷이 떠올렸다. 당시 침투계획은 진관사에서 청와대 뒤 북악산으로 직행하는 것이었지만 복병을 만났다. 바위산인 북악산이 눈에 덮여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만큼 미끄러웠던 것. 계획을 바꿔 대로인 세검정길로 나왔다. 결국 우리 군경에 발각돼 교전이 벌어졌고 우이령 고개를 넘어 퇴각하다 파주 문산에서 대다수가 사살됐다.

“나 때문에 예비군이 창설됐습니다. 내가 남한을 강하게 만든거죠. 지금 예순이 넘은 사람들은 군복무 시절 김신조 때문에 고생했다고 혀를 내두릅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나라를 지켰는지 잘 모릅니다.”

“북한은 지금도 굶주린 주민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고 있는 체제인데도 자유가 넘쳐나고 생활이 풍요로운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북을 찬양합니다. 군사기밀까지 서슴없이 넘겨주는 정신 나간 종북주의자들의 국가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김 목사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김정일 사망 때 북한 주민들이 옷을 벗어 눈길을 덮었습니다. 절대 연기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을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나 또한 북한에 있을 때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북한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김 목사는 이날 “남한 사람들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성선화 기자 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