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화가의 '부드러운 미학'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2층 전시장에는 나무, 종이, 와이어, 아크릴 등 색다른 재료로 만든 회색빛 추상조각이 유리관 속에 놓여 있다. 여체를 연상시키며 성적인 암시도 은근히 내비친다. 미국 여성작가 에바 헤세(1936~1970)의 파격적이고 부드러운 조각 ‘인사이드’(30×30×30㎝)다. 지금도 헤세의 팬들은 그의 미니멀 조각에 열광한다.

헤세는 1960년대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 속에서 독창적인 미학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헤세의 원화를 보긴 힘들었다.

국제갤러리가 올해 첫 기획전으로 준비한 ‘에바 헤세’전은 미국 미술사학자 브리오니 퍼, 르완 맥키넌과 에바 헤세 재단의 디렉터 베리 로즌이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는 1960년 헤세가 예일대 졸업 직후 뉴욕으로 건너가 첫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회화 48점 중 20점과 비교적 부드러운 미니멀 조각 15점을 보여준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헤세는 34세에 뇌종양으로 요절하면서 1960년대 미국 현대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두 살 때인 1938년 나치 정권에 의해 폴란드 수용소에서 강제추방돼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뉴욕에서 아실 고키와 빌럼 데 쿠닝의 영향을 받아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60년대 미니멀리스트 솔 르윗, 로버트 스미스슨, 낸시 홀트, 멜 보흐너, 댄 그레이엄 등과 활동하며 조각에 더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헤세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주로 활용한 알루미늄, 플라스틱, 납, 폴리에틸렌, 구리 같은 비정통적인 재료에서 벗어나 고무호스, 풍선, 밧줄 등 가벼운 재료로 ‘부드러운 조각’ 세계를 구축해 주목을 받았다.

사후 2년 만에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기획전이 열렸고,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2002), 뉴욕 드로잉센터와 주이시 뮤지엄(2006)에서도 회고전이 이어졌다. 그 후 작품값이 치솟아 이름값을 더했다.

생전에 공개되지 않은 그의 그림에서는 신체와 유령의 이미지를 융합한 추상표현주의적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거친 표면 처리와 스크래치, 드리핑, 채도가 낮은 색채는 빌럼 데 쿠닝과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그의 미니멀리즘 조각은 연약한 현대인의 내면을 공간과 형태, 색채의 조화로 응축해냈다.

그는 1964~1965년 독일에 체류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조각작업에 매달렸다. 그물에 종이 뭉치를 넣고 검은 에나멜로 칠한 평면에서 출발해 점점 더 입체로 관심을 넓혀갔다.

자신의 작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꺼려했던 그는 “페인팅은 어디에서 끝나며, 드로잉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고 자문하며 “나의 조각 작품들은 페인팅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삶은 짧았지만 다작을 했던 헤세의 예술 인생에서 실험성을 보여준 특정 순간에 주목했다”며 “현대 조각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헤세의 대담한 작업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자화상을 감상하듯 그의 작업에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4월7일까지.(02)735-8449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