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이 꿈꾼 '무릉도원'…서울에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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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산책 -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북악산 자락 숨은 비경 '백사실'
"정자 아래 흰 모래…별천지 같다"
'백사'로 號 짓고 별장으로
정자 터·연못 흔적 아직도 남아
북악산 자락 숨은 비경 '백사실'
"정자 아래 흰 모래…별천지 같다"
'백사'로 號 짓고 별장으로
정자 터·연못 흔적 아직도 남아
서울에는 곳곳에 숨겨진 비경이 많다.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별서(別墅)인 백사실(白沙室)은 도심 속의 무릉도원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항복의 호 중 대표적인 것이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인데, 필운은 필운대(弼雲臺)와 관련이 깊으며, 백사는 백사실에서 유래한다.
필운대는 인왕산 자락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큰 암벽으로 이항복의 집터가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이곳에는 원래 권율의 집이 있었는데, 권율은 이 집을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됐다.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 자락에 있는 비경이다. 이항복은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 깊어 백사라는 호를 쓰게 됐다. 《백사집》에는 그날의 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해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했다.(…)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돼 보였다.’
이항복의 꿈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비로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해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항복은 “평생에 이러한 경계는 본 적이 없었다”며 꿈속의 선경을 본 기억과 함께 이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전하고 있다.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라고 했다. 이윽고 윤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했다. 나는 이때 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라는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시를 미처 더 이어 짓지 못한 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깼다.’
그는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 생각했다.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에게 양여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 집 사람들에게 천기를 누설하지 않았다고 그는 썼다.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에 거주하면서 백사실을 별서로 삼은 이항복의 서울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항복은 서인(西人)으로 활약했지만 당색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무 관료로 자질을 발휘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주로 피난을 가는 선조를 호종해 전란 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책봉됐다.
그러나 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는 이항복에게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이항복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결국 유배지 북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도 이항복은 그토록 풍취가 좋았던 인왕산의 필운대와 북악산의 백사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백사실은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조성한 동천(洞天·경치 좋은 곳)으로, 비교적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백사실 입구의 큰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는 이곳이 별세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백사실의 중심부에는 정자를 지은 터와 연못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선비의 별장으로 매우 적합한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은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된 인왕산 자락의 무계동(武溪洞) 계곡과도 인접해 있어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곳의 절경을 체험하게 한다. 백사실은 명승 유적과 함께 자연 생태가 어우러진 지역으로 도롱뇽,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는 청정무구의 공간이다. 서울 도심 지척에 있으면서도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백사실. 백사실을 찾아 옛 선인들의 학문과 풍류를 접해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필운대는 인왕산 자락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큰 암벽으로 이항복의 집터가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이곳에는 원래 권율의 집이 있었는데, 권율은 이 집을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됐다.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 자락에 있는 비경이다. 이항복은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 깊어 백사라는 호를 쓰게 됐다. 《백사집》에는 그날의 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해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했다.(…)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돼 보였다.’
이항복의 꿈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비로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해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항복은 “평생에 이러한 경계는 본 적이 없었다”며 꿈속의 선경을 본 기억과 함께 이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전하고 있다.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라고 했다. 이윽고 윤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했다. 나는 이때 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라는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시를 미처 더 이어 짓지 못한 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깼다.’
그는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 생각했다.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에게 양여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 집 사람들에게 천기를 누설하지 않았다고 그는 썼다.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에 거주하면서 백사실을 별서로 삼은 이항복의 서울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항복은 서인(西人)으로 활약했지만 당색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무 관료로 자질을 발휘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주로 피난을 가는 선조를 호종해 전란 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책봉됐다.
그러나 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는 이항복에게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이항복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결국 유배지 북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도 이항복은 그토록 풍취가 좋았던 인왕산의 필운대와 북악산의 백사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백사실은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조성한 동천(洞天·경치 좋은 곳)으로, 비교적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백사실 입구의 큰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는 이곳이 별세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백사실의 중심부에는 정자를 지은 터와 연못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선비의 별장으로 매우 적합한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은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된 인왕산 자락의 무계동(武溪洞) 계곡과도 인접해 있어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곳의 절경을 체험하게 한다. 백사실은 명승 유적과 함께 자연 생태가 어우러진 지역으로 도롱뇽,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는 청정무구의 공간이다. 서울 도심 지척에 있으면서도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백사실. 백사실을 찾아 옛 선인들의 학문과 풍류를 접해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