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경 "癌 이겨낸 힘으로 차이코프스키 완주했죠"
“힘들었어요. 그래도 200~300년 후 ‘동양의 여성 피아니스트 서혜경, 연주 죽여줬네’ 소리를 들을 만큼 일생일대의 영예로운 일을 하고 싶었죠.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이제 무서운 게 뭐가 있겠어요.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이죠.”

2010년 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녹음 앨범에 이어 지난달 27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전곡 녹음 앨범을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로 내놓은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 다음달 뉴욕 링컨센터 독주회 준비로 뉴욕에서 작업 중인 그를 전화로 만났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힘찬 목소리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유방암과 싸웠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날 연주되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은 그의 제자 질로티가 개작한 버전이죠. 자, 들어보세요. 이게 흔히 들었던 거예요.” 귀에 익숙한 1악장 첫 소절을 연주한 그는 “원본은 하프가 연주하는 식으로 부드럽게 흘러간다”며 오리지널 버전을 비교해 들려줬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2번에는 피아니스트가 빠른 기교로 솔로 연주를 해야 하는 카덴차가 세 번이나 나온다. 러시아풍의 강렬한 행진곡 다음에 짧은 모티프들이 전개되고 독주자의 절정과 완화가 펼쳐진다. 카덴차가 끝나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코다가 등장한다.

2악장은 우아한 주제 뒤에 깡충거리는 가락이 뒤따르면서 어지러운 비행이 이어지고 3악장까지 눈부신 피아노 기법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체력과 기교, 성실하고 오랜 연습 기간 등이 모두 필요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전곡 녹음은 그래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과 더불어 여성 피아니스트들이 꺼리던, 감히 쉽게 도전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불과 2년 새 두 장의 앨범을 모두 발매한 건 클래식계에서 ‘기적적인 일’로 평가된다.

“하나의 앨범 녹음을 시작하기까지 준비 기간만 3년이 걸려요. 보통 연주자들은 한 곡 녹음하고 6개월 정도 연습 기간을 가진 뒤 오케스트라를 소집하죠. 그래서 앨범 녹음 기간이 몇 년씩 걸리곤 해요. 전 그런 꼴 못 봐요. 수많은 사람들이 제 앨범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였는데 어떻게 그래요. 라흐마니노프 녹음은 열흘 만에 끝냈는데 녹음 직전 팔이 빠져 헝겊 깁스를 하고 녹음하기도 했죠.”

이번 앨범에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3번과 콘체르트 판타지아, 질로티 개정판과 차이코프스키 원본 버전의 1번 1악장이 들어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프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믹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했다. 드미트리예프는 러시아 지휘자 중에서도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 전문가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드미트리예프는 한 오케스트라를 3~4년간 인솔해온 명망 높은 리더예요. 사진 찍는 게 취미인 그는 악장과 어울리는 사진을 연주자에게 보여주며 ‘호숫가에서 연주하듯이 해봅시다’ 등의 대화를 나누죠. 지난해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가 ‘이런 녹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며 빠른 시일 내에 차이코프스키 연주를 하자고 먼저 제안해왔어요.”

그는 다음달 2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베토벤의 ‘론도’ ‘열정 소나타’와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파가니니 변주곡 등을 연주한다. 줄리아드음대 박사과정 동창이자 세계적인 작곡가인 로웰 리버만의 곡도 세계 초연한다. 앞으로 있을 녹음과 연주 일정만 생각해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죠. 죽음과도 싸워 이겼는데 못할 게 어디 있겠어요. 제가 군것질을 좋아해서 별명이 ‘디저트 퀸’인데 디저트 못 먹는 것 빼곤 요즘 행복할 따름이에요.”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