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그리운 詩人 아버지
아버지 김규동 시인께서 지난해 9월 말 별세하셨다. 내 인생 가장 큰 행운은 더없이 훌륭하고 자상한 최고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아버지는 시대를 배반하지 않은, 문단에서 가장 정직하고 양심적인 시인이란 평을 받았다.

1925년 함경북도 종성 두만강 변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함북 경성고보 재학 시절 은사 김기림 시인을 만나 시에 눈뜨게 됐다. 의사인 부친의 희망대로 만주 옌볜의대에 진학했으나,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문학의 길로 접어드셨다. 1948년 김기림 시인이 서울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3년 예정으로 남행했으나 삼팔선이 막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셨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님과 아우, 누님들을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셨으나 끝내 말 한마디 못 나누고 눈을 감으셨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에게 모든 애정을 쏟으셨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점심 때 자주 학교에 들러 빵을 사주셨다. 남산동에 살다가 내가 청운동 고교에 진학하자 통학 편의를 위해 선뜻 부암동 산골로 이사하셨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자 다시 대학 근처로 이사하셨다. 늘 일찍 귀가하셨고, 귀가하실 때는 우리가 좋아하는 바나나와 초콜릿을 꼭 사오셨다.

여름이면 어렵게 경영하시던 출판사를 쉬고 대천과 만리포에서 보름을 보냈는데, 수영도 가르쳐주시고 문학 음악 미술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일요일마다 한강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돌이켜보면 가정적인 아버지와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수석 채집을 위해 아버지를 모시고 남한강 변을 뒤지고 다닌 추억은 참 따스하다.

군부독재가 망령처럼 이 땅을 휩쓸던 시절 아버지는 분연히 일어섰다.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대회에 참가하였고 자유실천문인협희회 165인 문인선언에 서명하였으며, 1980년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서명에 참가하셨다.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셨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1주일간 심문을 받고 책 2000부를 압수당하는 핍박도 받으셨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도 1977년 대학 시절 민주화 시위에 앞장서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그로 인해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면접에서 낙방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때는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조국의 민주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후회는 없다.

찾아 뵐 때마다 늘 따뜻한 미소로 맞으며 손을 꼭 잡아주시던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아버지! 타향살이 63년, 얼마나 힘드셨나요. 지나간 날들을 말없이 지켜본 고향의 우물가 느릅나무가 조용조용 해주는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부디 편히 쉬세요.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