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家 광고狂 "꼴찌가 멋진 아들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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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회장 장남 박서원 씨 '생각하는 미친놈' 출간
‘미친 놈’ 소리를 듣고도 쾌재를 부를 사람이 있을까.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32)만큼은 그런 사람이 틀림없다. 왜? 그는 “미쳤다는 말을 좋아하고, 칭찬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다닌다. 28일 출간한 책 제목도 《생각하는 미친놈》(센추리원 펴냄)이다. 프롤로그도 ‘미친 놈’으로 시작한다. ‘나는 미친 놈이다. 어려서는 노는 데 미쳤고, 디자인을 만나서는 공부에 미쳤고, 회사를 차리고서는 일과 사람에 미쳤다.’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밀어, 원하는 대로 조금은 강한 인상이면서도 반듯한 이미지의 박 대표는 그냥 미친 놈이 아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광고계의 유명 인사다. 2009년에 만든 반전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로 한국 최초로 국제 5대 광고제를 석권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우연히 얻은 행운이 아니었다. 건물 한 벽면을 책장으로 보이게 한 착시 현수막 ‘북쉘브’와 금연 캠페인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투명 재떨이’가 지난 4월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뉴욕 원쇼에서 3년 연속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세계 유명 광고제 수상작만 40여개를 헤아린다. 대학 2학년 때 회사를 차린 지 6년 만의 성과다.
이런 창의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크리에이티브라면 적어도 하나는 달라야 한다”는 박 대표는 ‘일상생활 속의 경험’과 ‘호기심’ ‘메모’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구나 겪는 일상생활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걸어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을 관찰하며 생각합니다. 교통표지판을 좀 더 쉽게 만들고 가로수를 더 큰 나무로 심으면 어떨까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 생각과 느낌들을 기록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어요. 적어 두지 않으면 잊어버리지만 어느 형태로든 기록했다면 기록했다는 기억만큼은 남는 법이거든요.”
사실 그는 공부 못하는 ‘루저’였다. 고등학교 때는 반 53명 중 50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3명은 직업반 학생이었으니까 늘 꼴찌였던 셈이다.
“공부가 재미 없었어요. 죽기 살기로 놀았죠. 자연히 성적은 안 나왔지만 노는 데에는 제가 제일 잘나갔어요.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받는 게 곤혹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은 “다음엔 잘할 거라고 믿는다”는 한마디뿐이셨죠. 솔직히 다음에 잘할 것이란 생각은 안 하고, 20년 뒤 멋진 아들이 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어요.”
어찌어찌 정원 미달인 대학에 들어갔지만 세 번 연속 학사경고를 받아 사실상 퇴학당했다.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고 경영학 사회학 기계공학 심리학 등으로 전공을 바꿔가며 적성을 찾았다. 그러다 시각디자인에 필이 꽂혔다.
“우연히 디자인하는 친구가 숙제하는 걸 봤어요.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었죠. 제 눈에는 친구가 취미생활을 하며 노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노는 데 쓰던 미친 에너지를 살짝 돌리면 됐어요. 태어나서 처음 올A를 받았고, 군대를 마치고 돌아가서 졸업할 때까지 전공은 만점을 받았네요. 2006년 동기생 4명과 빅앤트도 차렸고요.”
박 대표는 집안이 좋다. (주)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이다. 그러나 그는 재벌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부모 후광 덕을 본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두 번째 큰 상을 받고서야 집안 얘기를 했다. 그러자 “90%의 댓글이 욕으로 바뀌더라”고 했다. 배신당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환경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집안 환경이 달랐다면 하는 질문을 3년 전 받고 1년 정도 고민했어요. 그렇더라도 5~10년 뒤에는 지금과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어진 환경에 따라 출발선은 달라지겠지만 확실한 것은 ‘미친 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의해 미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결정짓는 거죠.”
그는 책 판매 수익금을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기부할 계획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회에 더 많이 환원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20개 프로젝트를 하면 2~3개는 좋은 프로젝트를 하려고요. 연말에 재능 기부도 하고요. 받은 만큼 돌려줘야죠. 저 혼자 이룬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밀어, 원하는 대로 조금은 강한 인상이면서도 반듯한 이미지의 박 대표는 그냥 미친 놈이 아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광고계의 유명 인사다. 2009년에 만든 반전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로 한국 최초로 국제 5대 광고제를 석권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우연히 얻은 행운이 아니었다. 건물 한 벽면을 책장으로 보이게 한 착시 현수막 ‘북쉘브’와 금연 캠페인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투명 재떨이’가 지난 4월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뉴욕 원쇼에서 3년 연속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동안 세계 유명 광고제 수상작만 40여개를 헤아린다. 대학 2학년 때 회사를 차린 지 6년 만의 성과다.
이런 창의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크리에이티브라면 적어도 하나는 달라야 한다”는 박 대표는 ‘일상생활 속의 경험’과 ‘호기심’ ‘메모’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구나 겪는 일상생활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걸어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을 관찰하며 생각합니다. 교통표지판을 좀 더 쉽게 만들고 가로수를 더 큰 나무로 심으면 어떨까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 생각과 느낌들을 기록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어요. 적어 두지 않으면 잊어버리지만 어느 형태로든 기록했다면 기록했다는 기억만큼은 남는 법이거든요.”
사실 그는 공부 못하는 ‘루저’였다. 고등학교 때는 반 53명 중 50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3명은 직업반 학생이었으니까 늘 꼴찌였던 셈이다.
“공부가 재미 없었어요. 죽기 살기로 놀았죠. 자연히 성적은 안 나왔지만 노는 데에는 제가 제일 잘나갔어요.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받는 게 곤혹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은 “다음엔 잘할 거라고 믿는다”는 한마디뿐이셨죠. 솔직히 다음에 잘할 것이란 생각은 안 하고, 20년 뒤 멋진 아들이 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어요.”
어찌어찌 정원 미달인 대학에 들어갔지만 세 번 연속 학사경고를 받아 사실상 퇴학당했다.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고 경영학 사회학 기계공학 심리학 등으로 전공을 바꿔가며 적성을 찾았다. 그러다 시각디자인에 필이 꽂혔다.
“우연히 디자인하는 친구가 숙제하는 걸 봤어요.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었죠. 제 눈에는 친구가 취미생활을 하며 노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노는 데 쓰던 미친 에너지를 살짝 돌리면 됐어요. 태어나서 처음 올A를 받았고, 군대를 마치고 돌아가서 졸업할 때까지 전공은 만점을 받았네요. 2006년 동기생 4명과 빅앤트도 차렸고요.”
박 대표는 집안이 좋다. (주)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이다. 그러나 그는 재벌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부모 후광 덕을 본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두 번째 큰 상을 받고서야 집안 얘기를 했다. 그러자 “90%의 댓글이 욕으로 바뀌더라”고 했다. 배신당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환경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집안 환경이 달랐다면 하는 질문을 3년 전 받고 1년 정도 고민했어요. 그렇더라도 5~10년 뒤에는 지금과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어진 환경에 따라 출발선은 달라지겠지만 확실한 것은 ‘미친 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의해 미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결정짓는 거죠.”
그는 책 판매 수익금을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기부할 계획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회에 더 많이 환원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20개 프로젝트를 하면 2~3개는 좋은 프로젝트를 하려고요. 연말에 재능 기부도 하고요. 받은 만큼 돌려줘야죠. 저 혼자 이룬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