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암묵적으로 형성돼 있던 대기업 간 금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경쟁구도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

SK그룹이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앞두고 있는 것에 대해 16일 재계 고위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반(半)강제적인 '빅딜'로 재편된 4대 그룹 등 재계의 사업지도,경쟁구도가 자발적 새판짜기에 진입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대기업 간 경쟁지도에 '빅뱅'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SK 외에도 생명보험 진출을 선언한 현대자동차그룹,제4이동통신에 뛰어든 현대그룹,'반값 TV' 판매로 삼성전자와 LG전자를 긴장시키고 있는 신세계 이마트의 행보도 기존 경쟁 질서를 허물 조짐이다. 이들 대기업의 잇따른 신사업 진출이 '상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재계의 오래된 '묵계'를 깨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유 · 통신을 주력 분야로 하는 SK는 그동안 삼성과 경쟁한 적이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고(故)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최 회장 10주기 때인 2008년 8월 "최 회장은 애국 기업인"이란 추모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런 삼성과 SK의 우호적 관계는 이제 반도체를 놓고 외나무다리 싸움을 벌이는 라이벌 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진섭 충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반도체 사업은 출혈 경쟁을 불사해야 하는 치킨게임의 성격이 강하다"며 "SK와 삼성전자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예상했다.

업계 관계자는 "SK가 통신과 정유사업에서 벌어들이는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시차를 두고 대만 등의 반도체 업체를 추가 인수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차그룹이 지난달 녹십자생명을 인수해 생명보험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0여년 이상 서로의 길을 갔던 삼성과 현대차그룹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삼성은 증권(삼성증권) · 보험(삼성생명 · 삼성화재) · 카드(삼성카드) 등으로 제2금융권에서 맏형 역할을 해왔다. 재계는 이런 삼성에 현대차가 도전장을 던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계의 한 인사는 "카드(현대캐피탈) 증권(HMC증권)을 갖고 있는 현대차가 보험에 진출함으로써 재계 1,2위 그룹이 제2금융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모양새"라고 했다. 삼성이 조만간 금융 계열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로 한 것은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있다.

신세계 이마트의 '반값 TV' 판매는 유통과 제조업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異)업종 간 경쟁을 예고했다. 막강한 네트워크를 갖춘 대형 유통업체들이 글로벌 소싱을 통해 제조업체와 본격적인 경쟁구도를 만들고 있다.

현대그룹이 2대 주주로 참여한 IST 컨소시엄이 제4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낼 경우 통신업계 경쟁구도는 3파전(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에서 4파전으로 확전된다.

자동차 시장에도 새 경쟁자들이 등장할 조짐이다. LG그룹은 지난 8월 미국 GM과 공동으로 전기자동차를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LG화학이 전기차 핵심 부품인 배터리를 GM에 공급하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전기차 개발 초기 단계부터 LG전자(공조시스템) LG CNS(충전 인프라) LG이노텍(모터) LG V-ENS(자동차부품 설계) 등 그룹의 모든 계열사와 GM이 협력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현재 하이브리드카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LG화학으로부터 납품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LG그룹뿐만 아니라 배터리와 정보기술(IT)을 갖춘 삼성전자가 전기차에 관심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차전지 시장은 종전 LG화학과 삼성SDI의 2파전에서 지난해 SK이노베이션이 가세, 3파전으로 번졌다.

정 교수는 "대그룹들이 2,3세 오너 체제로 넘어가면서 글로벌 생존 전략의 하나로 다각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룹 간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체질을 개선한 대기업들이 새 성장동력을 찾아 경쟁적으로 신규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연관 사업 다각화 전략을 구사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영역이 겹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