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에 16개 수중보가 완성됐다. 한국의 물 관리(治水)는 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2000년도 훨씬 전 전국시대 말기의 중국에는 서쪽 산 속의 진(秦)나라가 강하고 그 둘레에 몇 나라가 각축하고 있었다.

특히 진의 동쪽 한(韓)은 진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그 힘을 빼 보려고 계교를 썼다. 수리 기술자 정국(鄭國)을 보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 국력을 거기 쏟느라 이웃을 침략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꾀를 냈다.

기원전 246년(지금부터 2257년 전) 정국은 진에 들어가 그 대신들을 만났다. 산악지대 진이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사이를 운하(渠)로 뚫어 농토를 넓히면 부강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결과 그의 수리 공사는 시작됐지만,몇 년 만에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정국의 목숨과 함께 수리사업도 위기에 처했다.

그는 당초 그가 간첩으로 파견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나라의 명운을 몇 년 연장해 줄 수는 있겠지만,진을 위해서는 만세의 공을 세우게 될 것(臣爲韓延數歲之命 而爲秦建萬歲之功)"이라고.《한서》에 나오는 말이다. 진은 정국을 살려주고 그의 공사를 끝마치게 했다. 10년 공사가 끝나자 운하 길이는 150㎞,4만경의 땅에 물을 대주어 수확은 256만두(斗)나 됐다. 그 운하 덕택에 막대한 국부가 생겼고,그 덕으로 25년 뒤 기원전 221년에 진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다. 정국의 운하 덕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 진시황은 탄생했다.

중국 역사는 그를 '한국의 수리기술자 정국(韓國水工 鄭國)'이라 써놓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진나라의 운하를 파준 것처럼….물론 이는 전국시대 중국의 한(韓) 나라일 뿐,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어쨌거나 정국은 지금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유명하고,그의 운하는 지금도 건재하다.

치수에는 환경 문제 등 걱정도 많다. 하지만 우리의 4대강 치수도 정국의 운하처럼 2000년 이상을 견딜 것이라 기대해 본다. 태국의 물난리를 보며 더욱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오히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깜깜한 역사의식이다. 4대강의 16개 수중보 어디에도 우리의 치수 선각자들을 알아주려는 태도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농사가 절대로 중요하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여러 가지로 치수에 노력했다. 예를 들면 고려 이래 충남 태안에 건설하려던 운하는,조선 초 태종 12년(1412) 실제로 5000명을 동원해 개통된 일도 있다. 당시 좌의정 하륜(1347~1416)의 건의로 시작된 그 건설은 내년이면 꼭 600년이 된다. 당시 충청관찰사 우희열(?~1420)이 사업을 맡았는데,그는 일찍부터 수리에 열심이었고,1418년에는 전국의 제방과 관개시설 목록을 만들어 매년 감독하는 제도도 실시했다.

둑을 쌓고 관리하는 수리 담당 관청을 세우려는 논의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즈음부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관청 제언사(堤堰司)는 1662년(현종 3)에 대사간 조복양(1609~1671)의 건의로 제대로 시작돼 갑오경장 이후 폐지됐다.

수리에는 제방 말고도 양수(揚水) 장비도 중요하다. 세종 11년(1429)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서생(생몰년 미상)은 일본식 양수기,즉 수차(水車)를 도입하자고 건의해 몇 번이나 만들어 보급하려 했으나 실효가 없다는 평가만 들었다.

1433년 4월8일 드디어 세종은 "사람들이 새것을 꺼리는구나!(大抵人情, 憚於新作)" 한탄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대신들이 모두 수차 개량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불평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기록이 즐비한데 우리는 4대강 16개보 그 어느 곳에도 조상의 이름을 써넣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정신을 차려 어딘가에 한국수리박물관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박성래 <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