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제품이라고 가져왔나. " 신기술 개발에 대한 기대는 비난과 질책 속에 좌절로 바뀌었다. 스티로폼 입자 안으로 스며들어야 할 흑연이 손에 묻어났다. 흑연 가루가 날려 공장은 온통 시커멓게 변했다. 옷과 얼굴에 검정색 가루를 뒤집어쓴 작업자들은 "이게 무슨 신기술이냐"고 투덜댔다.

"연탄공장을 방불케 했죠.매일 검은 콧물을 흘릴 정도로 힘들게 매달렸는데,사장님까지 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망신이 없었어요. " 금호석유화학의 흑색 EPS(Expanded Polystyrene · 스티로폼)단열재 '에너포르' 개발팀원들의 속도 흑연처럼 검게 타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3년간의 끈질긴 연구는 악몽을 희망으로 바꿔 놓았다.

◆구박받던 미운 오리,검은 백조로 비상

금호석유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에너포르 생산에 성공한 것은 2008년 7월이었다. 3년간의 개발 과정에서 100억원이 투입됐다. '스티로폼=흰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석유화학업계에서 또 하나의 블루오션을 개척한 사례로 꼽힌다.

생산 첫해인 2008년 25억원의 매출로 출발했지만,올해는 211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3년 만에 840%의 매출 성장을 이루게 되는 셈이다. 금호석유가 2020년까지 세계 1위 제품 20개를 만들겠다는 2020프로젝트 리스트에도 '에너포르'가 올라있다. 박찬구 회장이 개발 과정과 성장 전략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애정이 큰 제품이다.

백색 EPS단열재 시장은 금호석유,바스프,SH에너지화학,LG화학,제일모직 등이 뒤엉켜 경쟁하고 있지만 흑색 EPS단열재는 금호석유와 바스프가 국내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2004년 바스프가 흑색 단열재인 네오폴을 국내에 선보인 후 금호석유는 그 시장성을 알아보고 개발에 착수했다.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지만 품질 개선에 주력한 결과,국내 시장점유율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금호석유는 '에너포르'와 관련해 6개 특허를 등록했다. 특히 단열이 우수한 발포성 폴리스티렌 입자의 2단계 제조방법은 미국,러시아에서도 특허 등록을 마쳤고 중국,유럽에도 등록을 추진 중이다.

◆1조원 규모의 중국 시장

"전체 에너지의 40%가 건축물을 통해 쓰이고 그 중 60%가 냉난방으로 소비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대체 에너지 개발도 좋지만 현재 소비되고 있는 에너지의 절감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이진희 금호석유 수지응용연구팀 선임연구원)

현재 국내 EPS단열재 시장에서 백색과 흑색의 비율은 8 대 2 정도다. 그러나 5년 뒤에는 국내 시장 절반이 흑색으로 대체되고,흑색 스티로폼 시장 규모도 1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에너포르'가 노리는 것은 한국 흑색 단열재 시장의 15배에 이르는 중국이다. 한국 시장은 중국의 7%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해 기준 중국 내 흑색 단열재 시장은 18만t,63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중국 시장 규모는 조만간 1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금호석유는 에너포르의 매출 중 절반을 이미 중국에서 올리고 있다. 중국 시장 확대를 위해 지난달 현지 건축설계관계자 등을 초청해 중국에서 에너포르와 관련한 세미나를 열었다. 연말엔 동북 3성지역을 대상으로 2차 기술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윤승희 금호석유 수지연구부문장은 "흑색이 백색에 비해 30%가량 가격이 비싸지만 뛰어난 성능이 알려지면서 수요는 점점 커지고 있다"며 "다른 업체들도 흑색에 대해 연구 · 개발 중이지만 특허문제 등으로 시장 진입이 쉽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흑색 EPS 단열재

기존 발포스티렌에 흑연을 첨가해 단열성능을 높였다. 흑연입자의 적외선 흡수와 복사열 반사로,백색 EPS단열재에 비해 열전도율이 30% 정도 낮다. 또 백색 EPS단열재보다 강도와 내구성도 높은 장점이 있다. 가격은 흑색이 백색보다 30% 비싸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