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보낸 가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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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인가요. 간간이 내린 비로 인해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붑니다. 땅바닥에 내쳐진 나뭇잎이 이승의 마지막 짐을 떨쳐버리듯 몸부림치는 모습이 심란합니다. 앞이 허전한 여자처럼 정면으로 안겨오는 가을과 등이 시린 남자같이 쓸쓸한 뒷모습을 보인 여름이 서로 ‘죄고 푸는’ 섭리가 놀랍습니다. 최고조의 절정을 향해 휘모리로 내달리다가 때가 되면 유유자적하는 자연의 긴장과 이완. 인간은 그 ‘곰삭은 순리’를 무시하며 뒤죽박죽 살다가 단맛, 쓴맛 다 겪은 후에야 고개를 떨구지요.
늦은 오후, 오랜만에 불암산에 올랐습니다. 집 옆에 끼고 사는 산이지만 최근 발길이 뜸했는데요. 걷기 열풍 이후 둘레길이 ‘앞 사람 엉덩이 보며 산책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붐비게 된 탓이 큽니다. 조용하던 이곳도 꽤 시끄러워졌지요. 자기만 듣는 음악을 크게 틀지 않나 강아지 똥을 방치하지 않나, 널려 있는 쓰레기는 또 어떻고…. 어떤 환경 전문가의 말처럼 ‘둘레길 문화가 활성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최근 사람이 많이 몰리면서 생태계 파괴가 예상되므로’ 인원제한 같은 조치를 적절히 취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정상 근처 경사가 급하지만 전망이 꽤 좋은 바위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확 트인 전면 오른 편에 안개 드리운 도봉산과 북한산이 눈에 차고 왼쪽으로 멀리 남산, 가까이는 아담한 ‘북서울 꿈의 숲’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초록군 사이사이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하고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습니다. 이성과 감정, 합리와 일탈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삶. ‘언제나 쓸쓸한 것은 지는 해의 노을이 아니라 지상에 남아 있는 뒷그림자’라는 어느 시인의 슬픈 잠언을 생각하며 검은 산을 내려 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젊은 시절 잔뜩 취한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부르던 ‘가을 편지’를 흥얼거립니다. “가을엔 목매어 주~욱~겠어요…. 헛헛” 다시 김민기도 불러내고 최양숙도 불러내지만 허허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에잇, 술이나 한 잔 하자! 같은 동네 사는 성당 후배를 호출합니다. 문자로 답이 옵니다. 근데 으잉? “나 지금 취해서 자고 있어요. 내일 연락할 게요.” 자고 있는 놈이 문자는 어떻게 보낸담. 괘씸한 인간이라니! ㅋㅋ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화가 고흐가 자기 동생에게 보냈던 편지 한 통이 내게도 도착해 있었습니다.
테오에게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바보를 보는 것처럼 사람을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그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하얀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
-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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