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은 틈만 나면 장인 권율과 농(弄)을 즐겼다. 어느 여름 입궐을 앞두고 장인에게 권했다. "오늘 더위를 견디기 힘드실 겁니다. 버선을 벗은 채 신을 신는 게 어떠실지요. " 권율은 의심없이 그 말을 따랐다.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항복은 어전회의 도중 너무 더워 대신들이 의관을 갖추고 있기 어려우니 신을 벗게 해달라고 주청했다. 차례로 신을 벗었으나 권율만 쩔쩔매고 있는 게 아닌가. 선조가 내관에게 명해 신을 벗기자 맨발이 드러났다. "사위 이항복에게 속아서 이리 되었사옵니다. " 내전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야사에 전한다.

'구름은 아득히 멀리 있고 나뭇가지에 바람 한 점 없는 날/누가 이 더위를 벗어날 수 있을까/더위 식힐 음식도,피서 도구도 없으니/조용히 책을 읽는 게 제일이구나. '조선 중기 문신 윤증의 피서법은 독서였던 모양이다. 품격으로 더위를 제압하려 했으니 몸은 적잖이 고달팠을 게 틀림없다.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는 좀 더 솔직하게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라 했다. 의관을 갖추고 있자니 하도 더워 크게 소리치고 싶다는 뜻이다. 체면 차리느라 염천에 띠를 매고 있을 때의 미칠 것 같은 심정이 잘 드러난다.

다산 정약용의 피서법은 실학자답게 실질적이었다. 깨끗한 대나무 돗자리 위에서 바둑두기,소나무 단에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하기,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뛰기,연꽃 구경하기,매미소리 듣기,달 밝은 밤 발 씻기….'덥다고 짜증내 봐야 나만 손해니까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일에 몰두하며 더위를 잊자는 취지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요즘 늦더위의 기세가 대단하다. 서울 8월 하순(21~31일)의 일 최고기온 평균은 30.7도로 예년보다 2.4도나 높았다. 일부 남부지방에선 폭염주의보까지 내려졌다. 그래선지 대구세계육상선수권은 스타 선수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이변 속에 기록 흉작에 시달리고 있다.

심사를 더 어지럽히는 건 정치 · 사회혼란이다. 한진중공업 사태와 강정마을 농성 등으로 어수선한 판에 곽노현 교육감의 후보매수 의혹사건까지 터졌다. 정치권은 나라살림이야 거덜나든 말든 포퓰리즘 경쟁을 벌이며 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머지않아 날씨는 선선해지겠지만 국민들의 답답한 가슴은 언제나 시원하게 뚫릴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