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물이 영웅인가. 위기 극복을 주도한 인물이 영웅 대접을 받는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을 지낸 폴 볼커 전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은 그런 '위기 관리자(crisis manager)'로 통한다. 그는 Fed 의장으로서 1980년대 초 13%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위기를 진화,미국 경제를 구해냈다. 제2의 금융위기를 차단할 월가 규제법 '볼커룰'을 디자인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볼커가 오는 11월1~3일 열리는 '글로벌 인재포럼 2011'에 참석한다. 그는 글로벌 경제 불균형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뒤 사공일 한국무역협회장과 토론을 갖는다. 볼커가 제시할 해법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린다. 그의 기존 발언들에서 경제위기 해법 조각들을 맞춰본다.

◆달러 더 풀고 인프라 투자해야

'미국 경제가 살아야 세계 경제가 산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 경제의 글로벌 영향력은 지대하다. 2008년 월가발 금융위기를 맞은 미 경제는 뒷걸음질치다가 지난해 1분기 3.9% 성장했다. 이후 성장률은 크게 둔화돼 지난 2분기 1.0%에 그쳤다. 실업률은 9.1%에 이른다.

볼커는 "기업들의 투자와 일반인들의 소비가 침체돼 있는 탓"이라고 분석했다. 미 경제의 70%를 담당하는 소비가 활발하지 않아 기업들은 투자에 자신감을 잃었으며 저조한 투자 탓에 일자리도 시원스럽게 늘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경제가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3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볼커는 벤 버냉키 현 Fed 의장의 통화정책을 지지한다. 버냉키는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1,2차 양적완화를 통해 2조3000억달러를 풀어 경기 회복에 불을 지폈다. 다음달 20~21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3차 양적완화 등을 포함한 추가 부양책을 채택할 가능성도 열어놨다.

가장 큰 걸림돌은 3차 양적완화에 따른 물가상승 문제다. 볼커는 '인플레 파이터'답게 "앞으로 수년 동안 인플레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15분 만에 기준금리를 올려 인플레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버냉키를 거들었다.

재정정책에 대한 볼커의 시각은 보다 장기적이다. 그는 "미 연방정부가 대규모 재정적자 상태여서 대규모 지출이 쉽지 않다"면서도 "영국과 같은 급격한 지출 삭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재정적자라도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견인할 인프라 투자용 지출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정적자 부담을 가중시키는 사회복지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퇴직연령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평한 글로벌 규제' 시행돼야

볼커 전 의장의 또 다른 글로벌 경제위기 해법은 자신이 주도해 만든 '볼커룰'이다. 지난해 의회를 통과한 80년 만의 월가 개혁법(도드-프랭크법)은 볼커룰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연방정부로부터 예금 보호를 받는 고객을 둔 은행들이 자기자본을 동원,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무분별하게 투자해 이익을 내는 행태를 막는 룰이다.

은행들이 자본(보통주 중심의 Tier 1 자본)의 최대 3%까지만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볼커는 "자기자본 투자가 성공하면 은행 수익으로 귀결되지만 실패해 은행이 부실해질 경우 결국 납세자들에게 부담(구제금융)을 전가한다"고 볼커룰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런 룰이 전 세계적으로 채택돼야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제2의 금융위기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만 볼커룰 규제를 신설하면 미국 내 은행들이 규제가 느슨한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수평 규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월가 간판 은행인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비니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월가 개혁법이 수십년 만에 가장 광범위한 변화를 몰고왔다"고 평가했다. 골드만삭스는 전체 영업이익 중 10%를 자기자본 투자에서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볼커룰 규제가 도입되자 골드만삭스 등 월가 은행들은 자기자본 거래 업무를 분사하는 등 부산하다. 골드만삭스의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투자 규모는 155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분기 현재 Tier 1 자본이 685억달러인데 볼커룰이 적용되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투자금액이 21억달러로 제한받는다. 볼커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이 회복되려면 3~6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산층 살리기가 곧 부의 재분배

그렇다고 볼커 전 의장이 일방통행식 규제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부유층에 대한 증세에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 "평생 동안 봐온 최대 '부(富)의 재분배'는 평균적인 미국 가정이 부유층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볼커가 중산층 살리기로 제시한 해법 중 하나는 10조7000억달러에 달하는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시장의 개혁이다. 그는 이 부분을 월가 개혁법에서 빠진 가장 큰 요소라며 안타까워했다. 대표적인 개혁 대상으로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모기지 전문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꼽았다. 프레디맥과 패니메이가 연방정부로부터 수혈받은 구제금융은 1500억달러에 달해 논란을 빚어왔다. 그는 "잘나갈 때 민간업체로 행세하고,부실해지면 공공기관으로 행세하는 '하이브리드 조직'이었다"고 두 업체를 비판했다.

볼커는 기업 관련 세제도 엉망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이 경제 성장을 위한 투자에 나서도록 미 정부는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에너지세 강화는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미국보다 가솔린 가격이 더 높은 유럽 국가들의 교통시스템이 미국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