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작고한 경영학의 거장 프라할라드는 2004년에 스튜어트 하트 교수와 '피라미드 바닥에 깔린 노다지(The fortune at the bottom of the pyramid)'란 논문을 공저했다. 저자는 '피라미드 바닥'으로 비유한 신흥국의 저소득층이 매력적인 소비시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진국에서도 신(新)빈곤층이 등장하면서 저소득층 시장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기업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 빈곤층 눈높이 맞춘 신흥국 기업들
이런 트렌드에 힘입어 근검절약의 DNA를 타고난 신흥국 기업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안과병원인 인도의 아라빈드(Aravind)는 미국의 1/10~1/60 수준인 50~300달러만 받으면서도 매년 20만건의 첨단 백내장 수술을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아라빈드 병원은 맥도날드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한 수술실에 여러 개의 침대를 두고 한 환자의 수술을 마친 뒤 곧바로 의자를 돌려 옆 수술대에서 대기 중인 환자를 수술하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해 회전율을 높인 결과 하루 50건 이상의 수술을 해내는 '프로세스 혁신'이 가능해졌다.
세계 3대 시멘트 회사인 멕시코의 세멕스(CEMEX)는 1994년 페소화 위기에도 빈곤층 매출은 거의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멕스는 빈곤층도 살 수 있게 시멘트를 작은 봉지에 넣어 싸게 팔았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이번엔 저소득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세멕스 간부들이 6개월간 직접 판자촌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빈곤층 사람들은 은행 대출을 받지 못해 돈이 생길 때마다 집을 조금씩 짓다 보니 집 하나 짓는 데 무려 13년이 걸렸다. 세멕스가 제시한 해결책은 '계(契)'였다. 계를 조직해 매주 돈을 모으게 하자 매출이 늘었다.
# 선진국 기업들도 비즈니스 모델 혁신
상황이 이쯤 되자 선진국 사업가들도 피라미드 바닥에 깔린 노다지를 캐내기 위해 새 비즈니스 모델들을 속속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부가 서비스를 제거한 저렴한 서비스다. 세계 항공업계가 고유가와 자연재해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저가 항공사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라이언에어는 비행기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좌석을 더 많이 두기 위해 의자를 뒤로 눕히지 못하게 고정했다. 쓰레기를 치우는 인력을 줄이기 위해 좌석에 주머니도 제거했다.
두 번째 유형은 사용량을 제한한 선불 서비스다. 휴대전화 사업자 립 와이얼리스(Leap Wireless)와 메트로PCS 등은 정액제 서비스를 소개,14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사용자의 신용과 예치금액에 따라 전기 사용료가 다른 미국에서는 싼 값에 전기와 가스 사용료를 선불로 내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신용이 낮으면 전기료가 높아질 것을 우려한 저소득층이 주 소비자다.
세 번째 유형은 협력적 소비 서비스다. 구매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 빌려 쓰는 방식이다. 기존 렌털과 다른 점은 가입자 사이에서 물건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스왑닷컴(Swap.com) 회원들은 책이나 DVD처럼 소비를 하더라도 물건 자체가 줄지 않는 물건들을 빌려주거나 교환한다. 아이들의 옷을 사고파는 스레드업(ThredUp)도 인기다. 회원들은 아이들이 커서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옷과 장난감을 온라인 박스에 등록한다. 마음에 드는 박스를 발견한 회원은 운송비를 포함,16달러만 내면 된다. 누적 거래가 100만건을 넘었다.
처음에는 빈곤층을 위해 개발한 서비스지만 일반인들의 인기를 끌면서 앞서 소개한 기업들은 기존 경쟁자들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트렌드는 세계 무대를 상대로 활동하는 한국 기업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과거 자동차,전자제품 등이 선진국 시장에 진출할 땐 해당 국가의 저가 시장이 필수적인 관문이었다.
이후 한국 기업들은 의도적으로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피라미드의 바닥을 되돌아볼 시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구매력은 날로 제한되고,주머니 얇은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을 때는 다시 한번 박리다매의 노다지를 노려볼 수도 있겠다.
김용성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yskim@ig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