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식민시대의 두 과학자 변수ㆍ이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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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동물학 선구…조국 못 돌아와
수난의 시절 불운한 삶 잊지 말길
수난의 시절 불운한 삶 잊지 말길
광복절에 생각나는 과학자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이번 8 · 15에는 우리 과학사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과학도를 생각해 본다.
첫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자인 농학도 변수(邊燧/樹 · 1861~1891)다. 1886년 1월 도미한 그는 1891년 6월 메릴랜드농대(지금의 메릴랜드대)를 나와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됐다. 졸업과 함께 모교에 남아 일본 및 중국의 농업 실태를 연구해 미국 정부에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아직 조선왕조 때였지만 갑신정변에 가담했던,말하자면 친일파였기 때문에 고국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런 그는 1891년 10월2일 대학 구내를 갑자기 통과하는 급행열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졸업한 지 몇 달 뒤,그의 나이 겨우 30이었다.
그가 조선에 돌아와 당시의 선진 농업을 국내에 보급할 수 있었다면 우리 농업은 훨씬 일찍 근대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변수는 1882년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교토에서 양잠과 화학을 공부했다. 4개월 만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귀국했지만 난리가 진정되자 다시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다. 또 1883년 7월에는 보빙사(報聘使) 수행원이 돼 미국에 갔다. 조선인 최초의 미국 방문이었다.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1월에는 민영익 서광범과 함께 미국을 떠나 유럽을 돌아 1884년 5월 귀국했다. 거의 10개월 동안 세계일주를 하게 됐으니 그 자체가 조선인 최초였다. 하지만 반년 뒤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그는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망명했고,1년 남짓 지나 천신만고 끝에 1886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둘째로는 이미륵(李彌勒)이 있다. 독일에서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해 유명해진 그는 원래 이름이 이의경(李儀景 · 1899~1950)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1919년 3 · 1운동에 가담했다가 스스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1919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머물며 가짜 여권을 만들어 독일로 갔던 그는 1928년 7월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첫 동물학 박사 학위이다.
하지만 일제하의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동물학 공부로 독일에서 살기도 어려웠을 듯하다. 그 대신 그는 독일에서 동양을 소개하는 문필가로 활약했고,해방 직후 1946년에 낸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성공해 독일학교 교재에도 올랐지만 51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조국에는 돌아와 보지도 못한 채였다.
이미륵이 1928년 학위를 얻은 직후 이 땅에 돌아와 생물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면 한국의 생물학이 더 일찍 일어설 수 있었을 듯하다. 후배 생물학자 석주명(1908~1950)은 이 나라 생물학이 조선인에 의해 시작된 시기를 1929년부터라 했다. 이미륵이 동물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1년 뒤부터다. 석주명은 전문학교랄 수 있는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나왔지만 나비 채집과 분류 등으로 크게 성공했다. 일제 시기 대학에서 생물학으로 학사자격을 얻은 조선인은 겨우 6명이란 통계도 보인다.
나라가 제대로라면 변수나 이미륵은 귀국해 이 나라 건설에 큰몫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을 맞으며 새삼 그들이 가졌을 설움에 내 마음이 무겁다. 걸핏하면 일제 잔재를 들먹이는 우리지만,처음으로 미국 땅에 한글 '벤수(Penn Su)'를 새겨놓은 변수의 미국 비석도,한자로 '李彌勒'을 새긴 독일의 이미륵 비석도 기억해 주는 한국인은 없다.
가을 기운과 함께 이 나라에는 다시 '노벨'풍이 불 것 같다. 하지만 과학계 노벨상에 조바심할 것이 아니라 일제 시기까지 우리 선조 과학자들이 얼마나 불운했던가를 한번쯤 다시 생각하는 광복절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와 '이미륵'이 조국의 과학 발달에 기여하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그 많은 과학도들을 찾아 기억해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
첫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자인 농학도 변수(邊燧/樹 · 1861~1891)다. 1886년 1월 도미한 그는 1891년 6월 메릴랜드농대(지금의 메릴랜드대)를 나와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됐다. 졸업과 함께 모교에 남아 일본 및 중국의 농업 실태를 연구해 미국 정부에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아직 조선왕조 때였지만 갑신정변에 가담했던,말하자면 친일파였기 때문에 고국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런 그는 1891년 10월2일 대학 구내를 갑자기 통과하는 급행열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졸업한 지 몇 달 뒤,그의 나이 겨우 30이었다.
그가 조선에 돌아와 당시의 선진 농업을 국내에 보급할 수 있었다면 우리 농업은 훨씬 일찍 근대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변수는 1882년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교토에서 양잠과 화학을 공부했다. 4개월 만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귀국했지만 난리가 진정되자 다시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다. 또 1883년 7월에는 보빙사(報聘使) 수행원이 돼 미국에 갔다. 조선인 최초의 미국 방문이었다.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1월에는 민영익 서광범과 함께 미국을 떠나 유럽을 돌아 1884년 5월 귀국했다. 거의 10개월 동안 세계일주를 하게 됐으니 그 자체가 조선인 최초였다. 하지만 반년 뒤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그는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망명했고,1년 남짓 지나 천신만고 끝에 1886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둘째로는 이미륵(李彌勒)이 있다. 독일에서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해 유명해진 그는 원래 이름이 이의경(李儀景 · 1899~1950)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1919년 3 · 1운동에 가담했다가 스스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1919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머물며 가짜 여권을 만들어 독일로 갔던 그는 1928년 7월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받은 첫 동물학 박사 학위이다.
하지만 일제하의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동물학 공부로 독일에서 살기도 어려웠을 듯하다. 그 대신 그는 독일에서 동양을 소개하는 문필가로 활약했고,해방 직후 1946년에 낸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성공해 독일학교 교재에도 올랐지만 51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조국에는 돌아와 보지도 못한 채였다.
이미륵이 1928년 학위를 얻은 직후 이 땅에 돌아와 생물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면 한국의 생물학이 더 일찍 일어설 수 있었을 듯하다. 후배 생물학자 석주명(1908~1950)은 이 나라 생물학이 조선인에 의해 시작된 시기를 1929년부터라 했다. 이미륵이 동물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1년 뒤부터다. 석주명은 전문학교랄 수 있는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나왔지만 나비 채집과 분류 등으로 크게 성공했다. 일제 시기 대학에서 생물학으로 학사자격을 얻은 조선인은 겨우 6명이란 통계도 보인다.
나라가 제대로라면 변수나 이미륵은 귀국해 이 나라 건설에 큰몫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을 맞으며 새삼 그들이 가졌을 설움에 내 마음이 무겁다. 걸핏하면 일제 잔재를 들먹이는 우리지만,처음으로 미국 땅에 한글 '벤수(Penn Su)'를 새겨놓은 변수의 미국 비석도,한자로 '李彌勒'을 새긴 독일의 이미륵 비석도 기억해 주는 한국인은 없다.
가을 기운과 함께 이 나라에는 다시 '노벨'풍이 불 것 같다. 하지만 과학계 노벨상에 조바심할 것이 아니라 일제 시기까지 우리 선조 과학자들이 얼마나 불운했던가를 한번쯤 다시 생각하는 광복절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와 '이미륵'이 조국의 과학 발달에 기여하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그 많은 과학도들을 찾아 기억해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