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Story] "사정불똥 튈라" 일정표 약속 지우는 게 일
국내 5대 그룹인 A사 대외협력실장은 수첩에 적어 놓은 일정을 하나둘씩 지우고 있다. 평소 '관리'해온 국토해양부와 지식경제부 등 부처 공무원들과 잡았던 골프와 저녁 약속이 무더기로 취소돼서다. 다음달 저녁은 물론 주말 일정이 거의 텅 비었다. 그는 "사정 바람속에서 공무원들이 바짝 엎드려 있어 골프와 저녁 접대는커녕 일상적인 업무 협의를 위한 점심 약속 잡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 대관(對官) 업무가 사실상 '올스톱'됐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의 사정작업으로 공직사회가 얼어붙으며 기업에서 공무원을 상대하는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뜻하지 않은 불미스런 일에 휘말리지나 않을지 좌불안석이다.

골프는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일부 정부 부처에서 골프 금지령까지 내리면서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잡힌 약속을 취소하는 게 주 업무가 됐을 정도다. B그룹 대관 업무 담당자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골프장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하고 있다"며 "공무원들 사이에선 '여름이 지나면 스크린 골프나 치자'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저녁 약속도 마찬가지다. 노래방이나 주점은커녕 간단한 식사 모임도 꺼리는 분위기다.

각종 세미나와 연찬회 협찬도 중단됐다. 그동안 기업들은 정부 부처의 연찬회나 세미나에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씩 건네는 관행을 이어왔다.

대관 업무를 맡은 대기업 직원들이 먼저 나서서 몸을 사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 C그룹은 사업 승인과 관련해 공무원을 자주 상대하는 대관담당 부서에 "당분간 언행을 조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며칠 전 지경부 실장급 인사 때도 이 같은 분위기는 여실히 드러났다. D사 대관업무 담당자는 "원래 새로 온 실장 방에 화분을 보내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그 쪽에서 오히려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아예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 담당자는 "과천 청사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로 비쳐질까봐 관가 출입도 딱 끊었다"고 말했다.

공직사회가 얼어붙으면서 대기업 대관 업무 담당자들 사이에선 일상적인 업무 협의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는 하소연까지 나온다. E그룹 대관 업무 담당 임원은 "요즘엔 정상적인 업무 협의를 위해 몇 번을 졸라야 공무원들과 점심 약속을 잡을 수 있다"며 "공무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1인당 3만원 선이던 점심값 내부 기준도 2만원 이하로 낮췄다"고 전했다. "심지어 식당에서 만나는 것을 꺼리는 공무원도 있어 과천 정부청사 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마신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정 여파가 자칫 대기업으로 불똥이 튀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정부의 '사정 바람'과 맞물려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물가관리와 동반성장 압박이 다시 거세질 수 있다는 얘기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의 대관 업무가 사실상 올스톱된 분위기지만,기업 입장에선 오히려 대관 업무 비중을 더 늘려 안테나를 높이 세울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장창민/조재희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