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산업이 성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규제 일변도의 정부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신약 연구 · 개발(R&D) 면세 혜택을 대폭 늘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논리다.

◆때만 되면 약가 인하, 과연 득일까

제약협회에 등록된 제약사는 191개(2009년 기준)에 이른다. 2000년 236개에서,불과 10년 만에 20%에 가까운 45개의 토종 업체가 시장에서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191개 제약사들의 평균 매출은 130억원.100억원 미만인 영세업체가 42개로 22%를 차지한다. 소수 상위 제약사를 제외한 대다수 업체가 R&D 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수출 비중은 5% 미만으로 대부분 내수 위주의 영업구조를 갖고 있다.

그나마 R&D 투자로 신약 개발에 공을 들여온 대형 제약사들도 정부의 저가구매 인센티브제,모든 의약품의 일괄적인 약가인하 추진 등으로 급격히 위축된 상황이다. 지난 1분기 국내 48개 상장 제약사의 R&D 투자는 1575억원으로 전년 동기(1580억원)에 비해 소폭 줄었다. 한미약품은 올 1분기 R&D 투자를 지난해 1분기보다 25.9%나 줄였다. 한미약품이 R&D 투자비를 줄인 건 1973년 창사 이래 처음이다.

중견 제약업체 A대표는 "정부가 모든 의약품의 약가를 일괄적으로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제약사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며 "신약 개발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자본력이 빈약한 국내사로선 10년 이상 매진해야 하는 R&D에 당장 수백억원을 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두채 남서울대 교수(보건행정학)는 "약가를 낮추는 게 소비자에게 일시적으로 좋을 수는 있겠지만 산업정책 측면에선 놓치는 게 많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약가를 무차별적으로 떨어뜨리면 국내 제약사들의 제네릭(복제약)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며 "결과적으로 중소 제약사들의 대량 퇴출과 함께 고가의 외국계 오리지널 의약품만 시장에 남게 된다"고 우려했다. 문경태 법무법인 세종 고문은 "전 국민 건강보험을 운용하는 대만도 로컬 제약사가 성장하지 못해 비싼 오리지널 약을 구입하면서 약제비 부담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R&D에 나서는 제약사에 30% 정도의 세액공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신약 개발에 15년 정도 걸린다는 점에서 대폭적인 면세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시아권에서 제약산업 강국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태국은 신약 R&D 투자에 대해 전액 세액공제를 해주고 있다.


◆'1원 낙찰' 폐지 바람직

지난해부터 시행된 시장형 실거래가상환제(저가구매 인센티브제)로 인해 제약사들은 의료기관(병원)에 터무니없이 싸게 약을 공급하고 있다. 지난 4월 끝난 서울대병원 연간 사용의약품 입찰에서는 무려 380여개 품목에서 '1원 낙찰'이 발생했다. 제약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저가입찰에 응하는 것은 낙찰이 돼야 병원 내 '처방코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방코드를 받지 못하면 병원 외부 약국에서 쓰이는 처방전에 자사 제품의 약을 등재할 수 없다. 현재 1원 낙찰은 국 · 공립병원에만 적용되지만 연내 종합병원에도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 교수는 "병원에 공급되는 약값을 낮춰 환자들의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취지이지만 제약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관행"이라며 "시장 가격의 몇 % 이하면 낙찰될 수 없도록 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정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