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벨기에 王 '고무 탐욕'…그 뒤엔 '콩고의 절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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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폴트 국왕과 콩고의 고무
고무 가격 폭등 틈타 최악의 '착취'
마을마다 할당…협력 안 하면 몰살
개인 사업처럼…돈은 자기 주머니로
고무 가격 폭등 틈타 최악의 '착취'
마을마다 할당…협력 안 하면 몰살
개인 사업처럼…돈은 자기 주머니로
유럽의 소국 벨기에는 산업화와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 말 일약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민하게 좇아간 이 나라는 철도를 건설하고 각종 산업을 발전시켜 국력을 키운 다음 다른 강대국들을 따라 아프리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자국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거대한 '콩고자유국(Free State of Congo)'은 벨기에 식민지라기보다는 사실상 국왕 레오폴트 2세의 개인 사업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예무역 철폐와 기독교 전도 등 온갖 아름다운 명분으로 치장했지만 콩고에서는 최악의 착취가 일어났다. 이 지역 산물로는 다이아몬드와 상아도 있지만 가장 수익이 높은 것은 고무 수액이었다.
19세기 이전에 고무는 고작 덧신이나 방수 옷감을 만드는 데 쓰였다. 고무의 용도가 이처럼 제한적이었던 것은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하게 굳고 기온이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성질 때문이었다. 찰스 굿이어라는 미국 발명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황처리법(vulcanization)을 발견한 후 고무는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강도와 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쓰임새가 거의 무한대로 넓어졌다.
존 던롭이 공기를 채워 넣는 튜브형 고무 타이어를 발명한 후 자전거가 대중화했다. 곧이어 자동차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자연히 자동차 바퀴에 들어가는 고무 수요도 증가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하고 신산업이 발전할 때마다 고무 수요는 폭증했다. 거의 모든 기계에 동력 전달,충격 완화,전기 절연을 위한 고무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는 곧 고무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무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19세기 말까지 가장 중요한 고무 생산지는 브라질이었다. 그런데 과도하게 고무 수액을 채취하다 보니 이곳의 고무나무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 영국은 교묘하게 고무나무 씨앗을 훔쳐 와서 런던의 큐 식물원에서 묘목으로 키운 다음 인도,실론,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식민지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영국은 농장에서 안정적으로 고무를 얻는 길이 생겼다.
다만 나무가 완전히 성숙해 수액을 채취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890년대부터 고무 가격 폭등은 피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콩고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실제 수익이 적어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레오폴트에게 고무 호경기는 하늘이 부여한 기회였다.
콩고에서 1㎏의 고무를 수집해 앤트워프 본사에 보내는 데에는 1.35프랑의 비용이 들지만,그곳에서 ㎏당 10프랑에 팔렸으므로 수익률이 무려 700%였다. 1890년과 1904년 사이 콩고의 고무 수익은 96배나 늘었다. 당시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식민지였다. 사실 야생 고무 채취 사업에는 수송비를 제외하면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노동력뿐이었다.
콩고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는 긴 넝쿨이 나무를 타고 30m 높이까지 올라가고 그곳에서 가지를 쳐서 다른 나무로 뻗어가는 특징을 지녔다. 원래는 이 넝쿨의 표면을 살짝 벤 다음 그곳에서 나는 수액을 받아야 하지만 넝쿨을 완전히 절단하면 더 빨리 채취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넝쿨이 죽기 때문에 관리들이 금지시켰지만 누구나 그런 식으로 일했다.
그 결과 마을 가까운 곳의 넝쿨들이 사라져갔다. 이제 수액을 채취하려면 점점 먼 곳까지 가야 했고,또 점점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이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고무 채취 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 그들은 마을을 덮쳐 여자들을 볼모로 잡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고무 수액을 가져와야 풀어주었다.
더 많은 양의 고무를 얻기 위해 잔혹한 방식의 할당 제도가 도입됐다. 한 사람이 2주 안에 말린 고무 3~4㎏을 바쳐야 했는데,이 양을 채우려면 숲속에서 한 달에 24일 정도 일해야 했다.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시코트(chicotte · 하마 가죽을 말려서 만든 나선형의 채찍)로 매질을 당했다. 맞다가 의식을 잃는 것이 태반이고 100대 정도를 맞으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고무 채집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의 공격을 받고 몰살당했다. 유럽 장교들은 아프리카 동맹군에 학살을 대행시키면서 일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그래서 아프리카 군인들은 시체의 오른손을 잘라 훈증 처리해 가져왔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때로 사냥에 총알을 사용하고는 산 사람의 오른손을 절단해 오기도 했다.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방식 역시 강압적이었다. 한 장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재소에 물자가 풍부하게 들어오더군요. " 어떤 주재소장은 권총으로 흑인의 귓밥을 쏘아 구멍을 뚫는 것이 취미였다.
마을 사람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무 수액에 흙을 섞자 그것을 흑인에게 강제로 먹인 대리인도 있다. 고무를 채취할 수 있는 넝쿨들이 완전히 멸종할 때까지 열대우림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계속됐다.
20세기 초 지구의 절반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벨기에 등 소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국가의 소유가 됐다. 그들은 본국에서라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들을 해외에서는 기꺼이 저질렀다.
20세기 경제 발전의 그늘에는 레오폴트 같은 잔혹한 제국주의자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자국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거대한 '콩고자유국(Free State of Congo)'은 벨기에 식민지라기보다는 사실상 국왕 레오폴트 2세의 개인 사업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예무역 철폐와 기독교 전도 등 온갖 아름다운 명분으로 치장했지만 콩고에서는 최악의 착취가 일어났다. 이 지역 산물로는 다이아몬드와 상아도 있지만 가장 수익이 높은 것은 고무 수액이었다.
19세기 이전에 고무는 고작 덧신이나 방수 옷감을 만드는 데 쓰였다. 고무의 용도가 이처럼 제한적이었던 것은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하게 굳고 기온이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성질 때문이었다. 찰스 굿이어라는 미국 발명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황처리법(vulcanization)을 발견한 후 고무는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강도와 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쓰임새가 거의 무한대로 넓어졌다.
존 던롭이 공기를 채워 넣는 튜브형 고무 타이어를 발명한 후 자전거가 대중화했다. 곧이어 자동차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자연히 자동차 바퀴에 들어가는 고무 수요도 증가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하고 신산업이 발전할 때마다 고무 수요는 폭증했다. 거의 모든 기계에 동력 전달,충격 완화,전기 절연을 위한 고무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는 곧 고무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무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19세기 말까지 가장 중요한 고무 생산지는 브라질이었다. 그런데 과도하게 고무 수액을 채취하다 보니 이곳의 고무나무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 영국은 교묘하게 고무나무 씨앗을 훔쳐 와서 런던의 큐 식물원에서 묘목으로 키운 다음 인도,실론,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식민지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영국은 농장에서 안정적으로 고무를 얻는 길이 생겼다.
다만 나무가 완전히 성숙해 수액을 채취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890년대부터 고무 가격 폭등은 피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콩고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실제 수익이 적어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레오폴트에게 고무 호경기는 하늘이 부여한 기회였다.
콩고에서 1㎏의 고무를 수집해 앤트워프 본사에 보내는 데에는 1.35프랑의 비용이 들지만,그곳에서 ㎏당 10프랑에 팔렸으므로 수익률이 무려 700%였다. 1890년과 1904년 사이 콩고의 고무 수익은 96배나 늘었다. 당시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식민지였다. 사실 야생 고무 채취 사업에는 수송비를 제외하면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노동력뿐이었다.
콩고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는 긴 넝쿨이 나무를 타고 30m 높이까지 올라가고 그곳에서 가지를 쳐서 다른 나무로 뻗어가는 특징을 지녔다. 원래는 이 넝쿨의 표면을 살짝 벤 다음 그곳에서 나는 수액을 받아야 하지만 넝쿨을 완전히 절단하면 더 빨리 채취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넝쿨이 죽기 때문에 관리들이 금지시켰지만 누구나 그런 식으로 일했다.
그 결과 마을 가까운 곳의 넝쿨들이 사라져갔다. 이제 수액을 채취하려면 점점 먼 곳까지 가야 했고,또 점점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이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고무 채취 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 그들은 마을을 덮쳐 여자들을 볼모로 잡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고무 수액을 가져와야 풀어주었다.
더 많은 양의 고무를 얻기 위해 잔혹한 방식의 할당 제도가 도입됐다. 한 사람이 2주 안에 말린 고무 3~4㎏을 바쳐야 했는데,이 양을 채우려면 숲속에서 한 달에 24일 정도 일해야 했다.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시코트(chicotte · 하마 가죽을 말려서 만든 나선형의 채찍)로 매질을 당했다. 맞다가 의식을 잃는 것이 태반이고 100대 정도를 맞으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고무 채집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의 공격을 받고 몰살당했다. 유럽 장교들은 아프리카 동맹군에 학살을 대행시키면서 일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그래서 아프리카 군인들은 시체의 오른손을 잘라 훈증 처리해 가져왔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때로 사냥에 총알을 사용하고는 산 사람의 오른손을 절단해 오기도 했다.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방식 역시 강압적이었다. 한 장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재소에 물자가 풍부하게 들어오더군요. " 어떤 주재소장은 권총으로 흑인의 귓밥을 쏘아 구멍을 뚫는 것이 취미였다.
마을 사람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무 수액에 흙을 섞자 그것을 흑인에게 강제로 먹인 대리인도 있다. 고무를 채취할 수 있는 넝쿨들이 완전히 멸종할 때까지 열대우림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계속됐다.
20세기 초 지구의 절반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벨기에 등 소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국가의 소유가 됐다. 그들은 본국에서라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들을 해외에서는 기꺼이 저질렀다.
20세기 경제 발전의 그늘에는 레오폴트 같은 잔혹한 제국주의자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