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취업정보업체 디스코의 우에하라 씨는 이달 중순 도쿄에서 여는 일본 내 외국인 유학생 대상 취업박람회 때문에 걱정이다. 유학생 신청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달 초에는 한국인 유학생을 구하지 못한 기업체의 손을 잡고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창사 3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일본 기업 하면 '취업하고 싶은 일류 회사'라는 이미지가 퇴색한 것 같다"는 우에하라 씨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지난달 말 일본 참의원(상원) 법무위원회에서 모리 마사코 자민당 의원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에서 12명이 굶어 죽었다"며 정부를 질타했다. 원전 사고로 고립된 주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쿄에 사는 금융회사 간부 나카무라 신지 씨(49)는 "아프리카의 극빈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국민소득 4만달러의 선진국 일본에서 벌어진 데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 일본의 예전 면모를 찾기 어렵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간 나오토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누구도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 자존심인 도요타자동차 소니 등 대표 기업들도 리콜과 고객정보 해킹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 결과 한국경제신문과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입소스가 지난달 벌인 공동조사에서 일본인들 중 자국 경제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은 7%로 나타나 세계 최저였다.

외국인의 이탈은 힘이 빠진 일본의 한 단면이다. 지난 4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수는 29만6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62.5% 줄었다.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4년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사업 철수나 주식 매각 등을 통해 지난해 일본에서 빠져 나간 외국 자금은 5조546억엔(약 67조5800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4년 만에 외국인 투자보다 유출이 많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일본 내수 규모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며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투자 매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일본 기업들마저 해외로 빠져 나가는 추세다. 반도체 제조업체인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일본에서 전량 생산하던 자동차용 칩을 싱가포르에서 위탁생산하기로 결정했다. 닛산 스미토모화학 소프트뱅크 등도 해외 생산 비중을 높일 계획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제조업 공동화' 우려까지 나온다.

기업들은 일본을 외면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진대책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자민당의 한 의원은 '부흥대책특별위원회'가 끝난 뒤 곧바로 룸살롱에 간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다. 간 총리의 내각불신임안을 놓고는 정치세력 간 적나라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전직 총리가 현직 총리에게 '쓰레기'라는 말까지 뱉었다.

일본의 정치 리더십은 사실상 실종 상태다. 스스로 퇴임 의사를 밝힌 간 총리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긴 어렵다. 그나마 퇴장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하다. 내각불신임안 표결 전에는 이달 안에 물러날 것처럼 얘기했다가 하루 만에 '내년 초'로 마음을 바꿨다. 곧바로 비난이 쏟아지자 지난 주말 측근을 TV에 출연시켜 "그렇게 오래 있겠다는 뜻은 아니고…"라며 한발 뺐다. 8월 퇴진설이 흘러나온다. 결국 그 역시 또 한 명의 '1년짜리 총리'가 될 공산이 크다. 일본은 2006년 이후 매년 총리가 바뀌었다.

도쿄에서 학원강사로 일하는 에구치 미치코 씨(56)는 "우리도 한국이나 미국처럼 직접 정치 리더를 뽑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은 집권당 의원들이 총리를 뽑는 일종의 '간선제'다.

그나마 일본의 성장을 뒷받침했던 기업들마저 요즘은 고개를 못 들고 있다. 한때 '워크맨 신화'로 세계 전자업계를 선도했던 소니는 3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올 들어서만 12건의 해킹 사건으로 기업 이미지도 훼손됐다. 도요타 등 자동차업체도 연이은 리콜로 신뢰도에 금이 갔다. 미국에서는 현대ㆍ기아자동차 등 한국 메이커에 시장을 빠르게 잠식당하고 있다.

구조조정에 들어간 회사도 적지 않다. '일본식 종신 고용'의 대명사로 불렸던 파나소닉은 전체 직원의 10%가 넘는 4만명을 감원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이른바 '1등 일본(Japan as number one)'으로 불리던 1980년대 말까지 일본 사회에 형성돼 있던 강한 자존심과 자신감은 그 후 20년이나 이어진 장기 불황으로 퇴색했다"며 "그 와중에 닥친 대지진은 일본 국민들의 자신감을 상실시켜 '사회적 공황(social panic)'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