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투기는 지난 수천년간 세계 경제사의 한 축을 이뤄왔다. 고대 로마시대 그라쿠스 형제가 곡물 투기에 대항해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 조치를 취했던 것부터 몇 년 전 헤지펀드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가 금 선물을 대량 매집하며 금값을 좌지우지했던 것까지 상품 투기에 얽힌 인물과 동원된 상품은 다양하다.

전근대 시기 투기에 가장 자주 동원된 상품은 '하얀 황금'이라고 불렸던 소금이었다. 프랑스 경제사가 장 프랑수아 베르지에는 "중세 이래 소금은 오늘날 석유와 비슷한 투기거래 대상이었다"고 평가했다. 소금 투기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13세기 프랑스 앙주지역 영주였던 앙주백작 샤를(1226~1285)을 꼽을 수 있다. 1246년 샤를은 유럽 최대 소금 산지인 페케 염전이 있는 프로방스 지역을 영지로 물려받았다. 그는 '가벨'이란 고율의 소금세를 물리며 소금 가격 통제에 나섰다. 프로방스산 소금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론강 유역 지역은 소금값 인상에 큰 고충을 겪었다. 론강 유역이 치즈 생산 중심지였던 만큼 샤를의 투기적 가격 인상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후엔 은을 둘러싸고 수많은 투기꾼의 운명이 갈렸다. 20세기 헌트 형제는 상품 투기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석유재벌 출신인 헌트 형제는 오일쇼크로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자 1974년부터 은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금보다 가격이 싸 시세를 쉽게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당시 은값은 온스당 2.5달러에 불과했고 헌트 형제는 은 선물 거래 등을 통해 막대한 양의 은을 확보,6년 가까이 은값을 20배나 상승시켰다. 1979년에는 1억온스의 은을 확보,40억달러의 시세차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1980년 시카고상업거래소(CME)는 1인당 최대 은 보유량을 300만온스로,뉴욕상품거래소(COMEX)는 1000온스로 제한했다. 헌트 형제는 7년에 걸쳐 모은 은을 팔아야 했고 은값은 10달러대까지 급락했다.

근대 초엔 "한 시간 안에 황금 3t을 모을 수 있는 유럽 내 유일한 인물"로 불리며 막강한 재력을 과시했던 대상인 야콥 푸거(1459~1525)가 은 투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푸거는 당시 세계 최대 은 광산이었던 티롤 지방 은 생산을 독점한 뒤 가격통제권을 행사하며 부를 축적했다.

투기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는 존 로(1671~1729)가 있다. 존 로는 미시시피 상사를 설립하고,아메리카 대륙 루이지애나의 지하자원 채굴 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미시시피 상사의 광고 팸플릿을 통해 '유리구슬과 금덩어리를 교환하는' 어수룩한 인디언 모습을 보여주며 자금을 끌어모았다. 미시시피 상사의 주식을 사기 위한 인파가 몰렸다. 순식간에 미시시피 상사 주식은 한때 발행가의 36배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차익 실현을 위한 매물이 쏟아지면서 1만리브르가 넘던 주가는 순식간에 500리브르 밑으로 떨어졌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