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열어본 남편이 놀란다. 반찬 그릇 사이에 휴대폰이 있는 탓이다. "당신,휴대폰 어디다 뒀어요?" 옷을 개키던 아내는 천연덕스레 답한다. "식탁 위에요,왜요. " '정신을 어디 빼놓고 사느냐'고 타박할 법 하건만 남편은 빙긋 웃곤 식탁에 휴대폰을 슬쩍 올려 놓는다.

나이 지긋한 부부의 정을 그려낸 피로회복제 광고다. 냉장고뿐이랴.화장실 수건 틈이나 옷장 서랍에 넣은 휴대폰을 못찾아 법석을 떠는 일도 다반사다. 심지어 벗어놓은 안경도 어디 뒀는지 몰라 온 집안을 뒤지기 일쑤다.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민망할 때도 많다.

기억력 감퇴는 나이든 모든 이들의 고민이다. 단기 기억력은 더하다. 40~65세 중년의 뇌가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뇌라는 책에서조차 단기 기억력은 젊은 사람들보다 떨어진다고 돼 있다. 나이 들면 '딱딱해야 할 건 부드럽고 부드러워야 할 건 딱딱해지며,옛날 일은 또렷이 기억하고 어제 일은 까맣게 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생긴 게 아닌 셈이다.

왜 그런가. 기억력 증진에 관한 보고는 많다. '잠을 잘 자야 한다'는 건 기본이고 '감정 표현에 솔직해야 한다'도 있다. 잔뜩 주눅 든 상태에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살을 빼야 좋다'고도 한다. 비만을 조절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한 결과 체중을 줄인 쪽의 기억력이 현저히 증진됐다는 발표다.

과도한 TV 시청은 독인 것으로 조사됐다. 호주 정부가 기억력과 생활습관과의 관계를 분석했더니 TV를 적게(하루 1시간 미만) 본 쪽이 뭐든 훨씬 잘 기억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일방적 정보에 뇌신경 세포가 지친다는 이유다.

새로운 이론도 나왔다. 나이 들면서 나타나는 기억력 감퇴나 집중력 저하는 뇌 기능이 저하돼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너무 많은 걸 담아두고 있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에서 젊은층과 장년층을 나눠 실험한 결과 장년층은 불필요한 걸 잘 지우지 못해 최근 걸 기억하지 못하더란 얘기다.

뭐든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입증된 셈이다. 그러니 어쩌랴.'맨 인 블랙'에서처럼 기억 삭제 총을 맞을 수도 없고.화려했든,분하고 쓰라렸든 가슴 속 켜켜이 쌓아둔 옛일들을 지울 수밖에.하루 30분 이상 운동,적게 먹기,독서와 글쓰기 등 기억력 증진에 좋다는 일도 실천하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