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은행들이 최근 몇몇 건설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보복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대출해준 기업이 채권단과 사전협의 없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해당 그룹 전체의 신용등급을 강제로 낮춰 고금리 부담을 지우겠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한 등급 내려갈 때마다 대출이자가 0.5%포인트 높아지는 벌칙을 주려는 것이다. 당장 이달 신용위험평가 때부터 적용할 계획이라고 하니 경쾌한 발걸음이다. 은행들이 먼저 나서면 담합시비가 생길 수 있으니 금융감독원이 나서달라고 요청까지 했다고 한다. 금감원도 은행들이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실로 놀라운 발상이다. 은행들도 그렇지만 금융당국도 정신이 온전한지 모르겠다. 외환위기 이후 그토록 강조해왔던 재벌개혁의 대원칙은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는 등 계열사 간 연결고리를 끊자는 것이었다. 선단식 경영을 가능케 한 소위 연환계(連環計)를 깨는 데는 실로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한 계열사가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주고 계열사가 연대보증을 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으니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그룹 계열사를 평가할 때 모기업의 지원계획서까지 요구할 모양이라니 재벌체제를 가장 선호하는 게 은행임이 이제야 분명해 졌다.
우리는 그동안 은행들이 기업의 재무상태와 사업성,영업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부업체보다 나을 게 없다. 건설사 대출금 회수도 저축은행 부채가 많은 곳을 가려내 빚독촉하는 게 전부다. 알량한 실적경쟁을 벌이면서 툭하면 '무슨 전쟁'이라고 가림막을 치는 것도 손쉬운 장사를 포장한 것일 뿐이다. 계열사들이 연대책임을 지고 상호지급을 보증하고 땅을 담보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은행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금융당국에 실로 할 말이 없어진다. 한국의 은행들이 왜 3류 소리를 듣는지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