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해서 받아들이기 정말 어렵다. "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말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로 돈을 벌어온 국내 은행들이 딱 여기에 해당한다. 싼 이자로 예금 받고,대출 기업에는 대주주 지급보증과 1순위 담보를 잡고 고금리로 돈을 빌려줘 마진을 챙겨온 게 한국의 은행들이다. 요즘 문제가 된 PF도 이름만 거창했지 실상은 담보대출이요,개인 대출에서도 거의 사라진 보증부대출에 다름 아니다. 외환위기 덕에 은행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조(兆)단위 이익을 내고,힘센 CEO를 모셔왔으니 감독당국의 잔소리도 크게 신경 쓸 게 없다. 그야말로 '은행 천국'이다.

이런 은행들이 최근 몇몇 건설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보복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대출해준 기업이 채권단과 사전협의 없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해당 그룹 전체의 신용등급을 강제로 낮춰 고금리 부담을 지우겠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한 등급 내려갈 때마다 대출이자가 0.5%포인트 높아지는 벌칙을 주려는 것이다. 당장 이달 신용위험평가 때부터 적용할 계획이라고 하니 경쾌한 발걸음이다. 은행들이 먼저 나서면 담합시비가 생길 수 있으니 금융감독원이 나서달라고 요청까지 했다고 한다. 금감원도 은행들이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실로 놀라운 발상이다. 은행들도 그렇지만 금융당국도 정신이 온전한지 모르겠다. 외환위기 이후 그토록 강조해왔던 재벌개혁의 대원칙은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는 등 계열사 간 연결고리를 끊자는 것이었다. 선단식 경영을 가능케 한 소위 연환계(連環計)를 깨는 데는 실로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한 계열사가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주고 계열사가 연대보증을 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으니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그룹 계열사를 평가할 때 모기업의 지원계획서까지 요구할 모양이라니 재벌체제를 가장 선호하는 게 은행임이 이제야 분명해 졌다.

우리는 그동안 은행들이 기업의 재무상태와 사업성,영업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부업체보다 나을 게 없다. 건설사 대출금 회수도 저축은행 부채가 많은 곳을 가려내 빚독촉하는 게 전부다. 알량한 실적경쟁을 벌이면서 툭하면 '무슨 전쟁'이라고 가림막을 치는 것도 손쉬운 장사를 포장한 것일 뿐이다. 계열사들이 연대책임을 지고 상호지급을 보증하고 땅을 담보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은행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금융당국에 실로 할 말이 없어진다. 한국의 은행들이 왜 3류 소리를 듣는지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