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발표가 난 지 이틀 만에 국민 앞에 섰다. 평소의 장고(長考) 스타일과 비교해서 신속한 움직임이다. 1일 기자회견에선 관례와 달리 기자들로부터 사전에 질문지를 받지 않았다. 모두 발언도 원고 없이 진행했다. 국민 앞에 '민낯'으로 나서 이해를 구하려는 뜻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는 설명했다. 지역 반발을 조기 수습하고 잇단 공약 파기로 인해 집권 4년차 레임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정공법을 택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다섯 번째 사과를 했지만 기자회견으로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국적 측면에서 결단"

이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안타깝다,송구하다"는 사과의 말로 회견을 시작한 뒤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우선 경제적 타당성이 결여돼 다음 대통령과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될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대선 후보 때 공약한 것을 지켜야 하지만 국익에 반할 땐 변경하는 것도 결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통령 한사람 편하자고 국민과 다음 세대에 부담을 주는 사업을 해버리자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공약해서 집행되는 사업이 모두 140조원이 넘는다며 부실 사례로 용인시 경전철을 꼽았다. 이전에 자신이 경제성이 떨어지더라도 추진해야 한다고 했던 호남고속철 사업에 대해선 "가능한 한 빨리 놓는 게 좋다"며 다소 모순되는 발언을 했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따른 대안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현재 김해공항의 500만 국내 이용객들이 KTX를 타면 국내선 이용 면적은 40~50%밖에 안 된다"며 김해공항 활용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박 전 대표에 대해 말 아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충돌은 피했다. 박 전 대표가 신공항 백지화에 유감을 표시한 데 대해 이 대통령은 "고향에 내려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박 전 대표가)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와의 관계를 '선의'로 봐달라며 '크게 마찰이 생겼다''충돌이 생겼다'는 보도는 안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선 박 전 대표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사회적 갈등 비용 엄청나"

전문가들의 평가는 인색하다. 국책 사업의 경제성,국익도 중요하지만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잇단 공약 파기로 인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권형기 한양대 교수는 "우리사회의 가장 근간인 대통령에 대한 믿음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며 "공약을 뒤집으면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사회적 갈등 비용은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신공항의 경제성 등을 국익으로 계산할 게 아니라 국격과 사회적 신뢰 등을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는 "무너진 국민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치적인데 이 대통령은 그걸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홍영식/김정은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