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1928~1987)의 1964년작 '플라워즈(flowers)'.요즘 오리온그룹 비자금 수사사건으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무채색 바탕에 꽃 네송이.색상이나 구도는 그다지 개성있어 보이지 않는다. 생활 주변에 넘쳐나는 싸구려 이미지를 풍긴다. 실제 이 작품은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을 판화로 찍어낸 것이다. 실크 스크린 인쇄 방식으로 제작돼 똑같은 작품이 1000여개나 나와 있다. 그런데도 작품 하나의 가격이 수억원을 호가한다. 단 한번의 작업으로 탄생했음에도 엄청난 '시가총액'이다.

워홀은 작품세계에 대한 예술적 비평과 별개로 현대 경영에 여러 시사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콜라병 통조림 대중스타 등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판화라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복제했다. 독창적인 창작세계와 작품의 유일무이함을 추구하던 당시 미술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이었다. 1960년대 초는 대중 소비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생기고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대중들은 변덕스런 유행에 정신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TV 보급 확대로 트럭운전을 하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인물이 벼락스타로 떠오른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 워홀이 대중들을 갤러리로 끌어모았다. 동네 슈퍼마켓의 통조림이나 3류 잡지에서나 등장하던 마릴린 몬로를 뉴욕의 콧대높은 갤러리에서 만나게 해 준 것.냉소적인 비평가들과 달리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워홀은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로 덩달아 높아진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꿰뚫어봤다. 동시에 극소수의 '신성한 영역'에 갇혀 있던 예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소통-개방-창의성이라는 3개의 최신 경영 키워드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무한복제라는 비예술성은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워홀이 동일한 작품을 찍어냈다고는 하지만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작품마다 변화를 줬다. 플라워즈의 경우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항상 꽃 색깔을 다르게 적용했다. 이 미세한 차이들을 앞세워 작품들 하나하나의 가치와 독창성을 높였다. 제조업으로 치면 다품종 소량생산이었고,철저한 차별화였다. 워홀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당당하게 설명했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일하는 것도 예술이고,비즈니스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

제작 방식도 독특했다. 그는 문화예술계 관련 지인들을 자신이 '팩토리'라고 불렀던 작업공간으로 불러모아 작품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했다. 대표작인 캠벨 수프 깡통 시리즈는 친구의 제안으로 시작했고,엘비스 프레슬리를 이용한 작품은 조수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이들의 생각을 채택할 때마다 돈을 줬다. 스스로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타인들도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요즘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작권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단순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항상 조수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경영자원의 외부화,각 경제주체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팩토리 운영방식은 한국 대기업의 수직계열화,이를 외부에 개방한 것은 오늘날의 애플 구글과 닮아 있다. 플라워즈가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것은 유감이지만,요즘 여러 일로 골치를 앓고 있는 기업인이라면 워홀의 역정을 한번 들여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모처럼 작품 감상도 하시고….

조일훈 IT모바일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