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일본 이와테현 내륙부에 있는 한 경찰서 교통계 창구."이재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다. " '긴급통행차량'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한 제약사 관계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테현 해안부에 있는 대피소에 의약품을 전달하는 운반 트럭에 휘발유를 넣을 수 있도록 긴급통행차량 확인증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한 뒤였다. 경찰은 주유를 위한 긴급통행차량 허가는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이 제약사는 휘발유를 구하지 못해 의약품 전달을 포기해야 했다.

3 · 11 대지진이 발생한 지 2주일이 다 돼 가지만 피해 현장에 식량 의약품 연료 등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답지한 구호품은 넘치지만, 쓰나미에 집을 잃고 대피소 생활을 하는 이재민 중 상당수는 아직도 난방이 안 되는 학교 강당에서 하루에 차가운 오니기리(주먹밥) 두 개밖에 먹지 못하는 생활을 한다. 지병을 앓고 있는 노인들은 혈압약 등을 못구해 위태롭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일본의 허술한 위기관리 체계,매뉴얼과 절차에 얽매여 유연하게 대응하지 않는 관료주의 등이 빚어낸 비극이라는 분석이다. 그 뿌리에는 누구도 결단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 리더십 부재가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간 총리,결단 않고 책임 회피

지난 22일 일본 여당인 민주당의 기카와다 도오루 의원(58)은 "총리실은 회의만 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결단과 실행인데,그게 안 보인다"고 말했다. 피해 지역인 이와테현이 지역구인 그는 이번 대지진과 쓰나미로 장남을 잃었다. 부모와 처는 실종 상태다. 일본 정부가 실행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간 나오토 총리부터 결단하고,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간 총리는 지난 17일 자위대 헬기가 후쿠시마 원전 상공에서 냉각수를 뿌리는 작전에 대해 "기타자와 도시미 방위상과 협의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오리키 료이치 통합막료장(합참의장)이 판단해 스스로 결심했다"고도 설명했다.

야마우치 마사유키 도쿄대 역사학과 교수는 "자위대원의 목숨이 걸린 위험한 작전에 대해 총리는 협의해 합의만 했고,결행을 결심한 것은 통합막료장이었다는 식이다. 간 총리의 전형적인 책임 회피"라고 비판했다. 그는 "책임은 위에서 지고,칭찬은 현장으로 돌려야 리더십이 생긴다"며 "간 총리에겐 그런 리더십이 없다"고 덧붙였다.

◆관료들은 복지부동

대지진 이후 위기 대응에서 일본의 엘리트 집단인 관료조직도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관료들은 매뉴얼에 있는 대로만 행동했다. 현장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이 관료를 불신하며 '정치인 주도'를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자민당 집권 시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비서관이었던 이지마 이사오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간 총리는 큰 그림은 그리지 않고,세세한 것까지 나서 혼란을 줬다"고 말했다. 간 총리가 개인적으로 전문가 자문을 얻어 후쿠시마 원전 냉각 방법까지 현장에 일일이 지시한 것을 대표 사례로 꼽았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