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파견 근무하던 미국 중부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 늦가을이 되면 2달러짜리 비닐부대에 사과를 마음껏 따갈 수 있게 하는 축제가 열리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빨갛게 익은 사과를 부대 가득 채워 오던 신나는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빨간 사과는 특유의 단맛과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따스한 자연의 축복으로서 인류와 함께 해왔다. 너무나 먹음직하고 탐스러웠기에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먹었던 금단의 선악과를 사과라고 인식하게 될 정도다. 이러한 사과의 이미지를 회사 로고로 처음 활용한 곳이 1968년 비틀스가 설립한 애플 음반사(Apple Records)다. 밝은 녹색의 사과 모양 그대로를 로고로 삼았으며,애플사는 비틀스 마지막 앨범인 'Let it Be'의 미국판 앨범에는 사과 로고를 빨간색으로 그리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테크플러스(tech+) 포럼에 연사로 참여한 재즈 드러머 남궁연 씨는 인류를 바꾼 두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이고 다른 하나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라는 것이다.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관찰에서 중력의 법칙을 도출했으며,잡스가 1976년 21세에 설립한 사과를 로고로 하는 애플컴퓨터는 지금 세계 최대의 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잡스는 오리건주 사과농장에서 선(禪)사상 애호가들과 교류한 데서 회사 로고를 사과로 정했다고 한다. 애플 컴퓨터의 초기 로고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는 뉴턴을 표현한 것이었는데,몇 개월 후에 바로 한입 베어 먹은 현재 모양의 사과 로고로 바꿨다. 1998년 초까지는 사과에 무지개 색을 넣어 사용하다가 이후 단색으로 디자인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폰과 같은 최근의 애플사 제품에는 은색 크롬 디자인이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과의 이미지와 상징성은 인간과 자연을 생명체로 연결하고 종교 철학 물리 음악 예술 그리고 기술에까지 넘나들며 창의성과 상상력의 영양분이 되고 있다. 특히 애플사의 은색 사과로고는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을 추구하는 잡스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브랜드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등 세상을 바꾸는 제품들은 기술적 성능과 인간적 감성이 서로 만남으로써 탄생한 것이며 이제는 전통적인 음반,애니메이션 영화,PC,전화기,멀티미디어,페이퍼 인쇄물들을 삼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술은 아직도 대부분 각자의 연구실 칸막이 안에서 성능 위주로 개발되고 있고,경계를 넘나드는 창의력보다는 참여노동인건비와 회계장부에 의해 기계적 · 통제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형편이다. 세상을 앞서가고 인간미가 담긴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우리 기술나무에 빨갛게 익은 사과의 맛과 풍요가 풍겨나는 기술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하는 연구 · 개발(R&D) 문화를 창달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김용근 <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yonggeun21c@kiat.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