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눈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적어도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사사로운 명분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게 사리를 판단해야 한다.

한나라의 설립자 유방이 제국을 건설하면서 가장 고민한 문제는 수도 이전 문제였다. 제국의 도읍을 정하는 과제를 놓고 그는 고심에 잠겼다. 그러다 주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을 떠올렸다. 아직도 천자의 나라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과거의 찬란했던 주 문화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방은 수도를 옮기는 일에 착수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제나라의 포로 출신 유경(劉敬)이 낙양을 지나다 이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진언했다.

"폐하께서 낙양에 도읍을 정하신 것은 혹시 주나라 왕실과 융성함을 다투려는 것입니까?"

유방이 그렇다고 말하자 유경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주나라의 탄생 과정을 얘기하면서 주나라야말로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은나라 말기의 주왕(紂王)은 폭군 중의 폭군으로 자기 눈밖에 나면 신하든 제후든 가리지 않고 소금에 절여 죽이고,삶아 죽이고,심지어 포를 떠서 죽일 정도로 포악했다.

물론 그때까지 주나라의 힘은 미약했으나 요 임금 때부터 10대에 걸쳐 선정을 쌓은 덕분에 문왕대로 내려오면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아들 무왕이 즉위해 은나라 주왕을 칠 때는 맹진(孟津)에 모인 제후만 8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왕을 쳐야 한다고 말했고,마침내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주나라 성왕이 즉위하면서 낙읍(낙양)에 도성을 세웠는데,유경은 지금의 상황이 당시 주나라의 상황과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에 있다고 본 것이다. 유방이 1000여년 중원의 수도였던 낙양에 매료된 것은 어찌보면 그 역시 성왕과 같은 모습으로 폼나게 정치하고픈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그의 오판이 남길 커다란 후환을 유경은 정확하게 찍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경은 진나라의 수도 함곡관을 수도로 권했다.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하수가 띠처럼 흐르고 있으며,사면의 요새가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유경이 단호한 어조로 "폐하께서 함곡관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고 그 등을 치는 일입니다"(《사기》 유경숙손통열전)고 아뢰었다. 유방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유경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공을 치하해 낭중으로 삼고 봉춘군(奉春君)이라고 불렀다.

유경의 논지는 사람이란 자신이 걸어온 역정을 거울삼아 미래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유방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수도 이전 계획보다는 제국의 초석을 닦아 자손에게 잘 물려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도 수많은 정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이중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 유방에게 허울뿐인 낙양은 자칫 치명상을 남길 수도 있었다.

물론 오해도 있었다. 유방은 한(韓)나라 왕 신(信)이 모반하고 흉노와 손을 잡자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10명의 사신을 보내 정황을 탐색하도록 했다. 사신들은 한결같이 흉노의 전력이 형편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유경만은 흉노의 전력이 위장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유방은 그를 옥에 가두고 진격했다가 흉노에게 포위돼 죽을 뻔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방은 그때서야 유경의 진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앞서 갔던 사신들의 목을 모두 베어버렸다. 유경에게는 식읍 2000호를 내려 관내후(關內侯)로 삼고 건신후(建信侯)라 불렀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