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도시의 시장이 됐다고 생각하고,도시의 교통 · 치안 · 도시위생 관련 인프라를 구축해 보세요. 예산문제를 따져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일 겁니다. 특히 당장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한 부분만 고민해선 도시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없습니다. "

지멘스 싱가포르 본사 로비에 있는 '미래도시센터'에는 대형 화면을 통해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 '심시티'와 비슷한 도시건설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지멘스 건물 방문객들은 재미삼아 도시개발 게임을 해보지만 5분도 안돼 '파산'하거나 가상도시가 '무법천지'나 '슬럼가'로 변하기 일쑤다. 미래도시센터 가이드는 "지금까지 도시운영 게임을 해본 200여개 그룹 중 단 5개 그룹만 파산을 면했다"며 "도시개발을 할 때는 어느 한 부분만 살펴볼 게 아니라 전체적인(holistic) 시각을 갖추는 게 필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게임시설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부분이 아닌,유기적 전체를 바라본다


독일의 대형 전기 · 전자업체인 지멘스는 도시 시뮬레이션 게임의 경우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체적인 시각'을 강조한다. "부분적인 문제만 보고,관련 기술이나 제품만 팔아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도시나 조직을 생명체와 같은 복합적인 유기체로 파악하는 것은 영 · 미 기업과 다른 독일 기업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지멘스가 특정 부문에 특화하지 않고 △건설 △인텔리전트 빌딩 △보안 △조명 △정보통신 △보수 · 유지 △의료기기 △컨설팅 등 다양한 사업부문을 갖춘 조직으로서 강점을 최대화하기 위해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종합능력에 중점을 둔 지멘스의 강점은 아시아 시장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두드러진다. 소규모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선 체계적인 대형 도시개발 사업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8년 완공된 350m 길이의 인공둑 '마리나 제방(Marina Barrage)'이다.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도시의 물 수요량을 충당할 넓은 저수지나 큰 강이 없어 고심했다. 결국 국토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대규모 취수원 건설에 나섰고,여기엔 담수화와 정수기술 등 지멘스의 '종합' 기술력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또 싱가포르 전 지역에서 발생하는 오 · 폐수를 중력만으로 정수장에 모아서 초미세막 여과와 역삼투압 및 자외선 소독 과정을 거쳐 음용수 '뉴워터'로 재활용하는 창이 정수장의 복잡한 여러 시설에도 지멘스가 두루 참여했다. 지멘스 측은 "2014년까지 친환경 분야 매출을 400억유로로 키울 계획"이라고 제시했다.

◆A부터 Z까지 철저한 준비


지멘스가 큰 프로젝트에서 효율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배경에는 회사 측이 갖춘 협업시스템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멘스의 협업시스템은 대략 '객관적인 잠재력 평가→우선순위 설정→부서별 심층 조사→통합 프로젝트 관리'의 순서로 진행된다. 각 산업부문 간 정기 회의와 정보 공유를 통한 협업이 상시화돼 있다.

지난달 지멘스가 발표한 '그린 시티 인덱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멘스는 아시아 22개 도시를 대상으로 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방출,교통,쓰레기 처리,대기질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친환경 인프라와 주요 친환경 정책에 대한 등급을 매겼다.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다. 얀 프리드리히 지멘스 경제인텔리전스부문 책임연구원은 "조사작업은 지멘스의 각 사업과는 별도로 독립돼 진행한다"며 "현재 지멘스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의 유 · 불리를 떠나 객관적인 지표가 일단 만들어지면 이를 바탕으로 전사적인 신사업 구상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시너지 극대화 분야에 집중한다


지멘스가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췄고,부문 간 협업이 활성화돼 있지만 '문어발'식 경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업 간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로 사업군이 집중돼 있다.

이런 경향은 4년 전 피터 로셰 최고경영자(CEO)가 160년 지멘스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출신 수장을 맡으면서 두드러졌다. 로셰 CEO는 자동차부품 자회사인 VDO를 160억달러에 팔고,미국의 의료스캐너업체 데이드베링홀딩스를 70억달러에 인수했다. 가전부문에서 철수하는 대신 에너지 교통 의료 등 인프라 사업에 집중했다. 풍력터빈도 해상용에 집중,세계 해상 풍력터빈 시장 점유율을 5% 수준에서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집중적인 협업의 또 다른 사례로는 '녹색 병원' 사업을 꼽을 수 있다. 병원은 다양한 의료 장비를 갖추고 있어 전력 소모가 크다. 또 재활용 쓰레기나 폐기물 발생도 많은 조직이다. 의료기기 사업과 에너지 효율화 사업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지멘스는 이 같은 병원의 특성에 착안,헬스케어 부문 제품을 판매하는 동시에 △쓰레기 발생 억제 △재사용 △재활용 등 친환경 솔루션을 함께 판다. 1976년 개원한 독일 브레머하펜병원은 2005년 '종합처방'을 받은 뒤 1년 만에 에너지 소비를 25%(연간 52만유로) 절약할 수 있었다. 대형 빌딩들의 에너지 합리화 사업에도 지멘스 빌딩자동화 사업본부의 친환경 솔루션과 자회사 오스람의 조명시스템이 함께 참여하는 식으로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바바라 쿡스 지멘스 이사는 "각 사업부문이 정기 미팅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기술협력 사항을 협의한다"며 "각 사업부문이 통합적으로 프로젝트를 분석하고 난 뒤 개별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프로세스가 확립된 점이 지멘스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