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불만 제조기 '직장 탈레반'…활동 무대는 익명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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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내 '투덜이 스머프'
B급 정보·루머의 포털
"경영진부터 이러니…" 건건이 트집, 취업카페에도 "우리회사 별로야"
이들을 보는 두 가지 시선
"자기 일도 못하면서" 냉소…"속이 시원" 대리만족 느끼기도
B급 정보·루머의 포털
"경영진부터 이러니…" 건건이 트집, 취업카페에도 "우리회사 별로야"
이들을 보는 두 가지 시선
"자기 일도 못하면서" 냉소…"속이 시원" 대리만족 느끼기도
△이름:홍길동,무명씨,아무개,까도남,길라임,사회지도층 등등 △주요 은신처:사내 게시판 및 휴게실,흡연실,탈의실 △주요 활동:회사 및 직장상사 '디스'(disrespect의 줄임말.비난,비아냥을 뜻하는 은어)하기 △경력:5~15년차가 대부분 △특징:사내 B급 정보와 루머의 포털 역할.사표 쓴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웬만해서는 퇴사하지 않음.△특기:게시판에서 불만 글 올리고 5분 후 아이디 바꿔서 찬성 댓글 달기.△주요 어록:"경영진부터 이러니…","내가 하면 30분이면 한다","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이 이력서를 보고 직장 내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당신이 근무하는 회사에도 '직장 탈레반'이 존재한다. 회사와 상사에 대한 불만에 가득차 사내 게시판에서 삐딱한 어투로 건건이 트집을 잡고,술자리만 되면 침이 튀겨라 상사를 오징어 안주로 삼는 직장 탈레반.회사 곳곳에 은신(?)해 있는 그들의 명암을 짚어본다.
◆양산되는 '어산지'들
시스템통합(SI)업체에 다니는 김모 차장(34)은 사내에서 소문난 '투덜이 스머프'다. 그는 친한 동료를 보면 회사에 대한 불만을 한가득 풀어놓는다. 개발팀 소속이지만 그가 타깃으로 삼는 영역은 사내 전 부문을 아우른다. 잘나가는 기획팀 부장의 부정 의혹을 제기하고,정부 발주 프로젝트에서 탈락한 영업팀의 무능력도 도마에 올린다. 결국 그는 사장을 대상으로 한판을 벌인다.
외부에서 온 사장이 혁신을 내세우면서 기존 직원의 임금과 복리후생을 동결하는 대신 신규사업 확대를 이유로 들어 경력직들을 더 많은 급여를 주며 데려온 것에 비분강개했다. 김 차장의 '어산지'(위키리크스 설립자) 심리가 발동했다. 사내 게시판에 사장이 추진하는 혁신 작업의 허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혁신팀 일원으로 추정되는 '친위대'에서 김 차장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 왔다.
이에 자극받아 김 차장의 비판 수위가 강해지고,횟수도 잦아졌다. 이미 문체를 통해 의심받던 그는 IP 추적까지 당했다. '선동분자'로 낙인찍혀 유 · 무언의 압박을 받던 그는 1년 뒤 이직했다.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차모씨(27)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인터넷 취업카페에서 해소한다. 채용공고가 취업카페에 올라오면 회사를 비방하는 댓글을 단다. 인사팀에서 회사를 마치 최고의 직장인 것처럼 미화하는 것에 견딜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제 친구가 여기 다니는데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알아보시고 지원하세요"라고 글을 쓰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쪽지가 오면 상세히 답변도 해 준다.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곳도 아닌 데다 공기업인데도 야근이 많고 잡무만 시킨다는 불만을 친구의 얘기를 빌리는 식으로 쏟아낸다. 소극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해진다고.
◆은어 사용해 동료들과 교신
직장 탈레반들은 주로 메신저나 휴게실,흡연실 등에서 정보를 교류하거나 불만을 공유한다. 메신저에서 그들의 타깃은 보안을 위해 주로 암호로 정해진다.
한 웹게임 업체 고위 임원의 별명은 이들 탈레반 사이에서 '계란'이다. 살짝 벗겨진 머리와 하얀 피부,계란형 얼굴 때문이다. "계란 오늘 상태 굉장히 안 좋네","맥반석 계란됐다"(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는 등의 표현으로 이 임원에 대한 뒷담화를 이어간다.
억울하게 탈레반으로 찍힌 직장인들도 있다. 신입사원 고은정 씨(25)는 휴가제도가 궁금해 인사팀에 문의했다. 담당 대리는 "휴가를 내려면 사장님 결재가 필요한데 사장님이 사유를 따져 퇴짜를 놓기도 한다"고 전했다. 고씨는 입사동기들에게 들은 내용을 이메일로 알렸다. "3년이 지나야 당당하게 휴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생각이 많은 밤입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 후 고씨는 인사과 과장에게서 "회사 휴가규정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습니다. 고은정 씨 동기들을 선동하려는 건 아니죠?"라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인사과장이 왜 답변을 했는지 의아해했던 고씨는 곧 메일 수신자에 동기와 동명인 과장의 이름이 실수로 들어갔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너나 잘해라" vs "속 시원하다"
한 대기업 인사팀에 재직 중인 김모 부장은 "직장 내 투덜이 중 99%는 일을 못하는 직원들"이라고 잘라 말한다.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고,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직원일수록 회사일에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김 부장은 이들은 인사 고과에서도 하위권에서 맴돈다고 폄하한다.
실제로 이들 탈레반을 대하는 다른 직원들은 "본인이나 좀 잘하지"하는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허수진 과장(34)은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는 김모 대리가 "회사가 야근수당도 안 주면서 출근시간을 확인해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할 때마다 속으론 하찮게 들린다고 한다. 허 과장은 "그런 불만도 지각을 잘 안하는 사람이 하는 것과 자주 늦는 사람이 하는 것은 다르다"며 "근무 태도가 불량한 사람이 불만을 내뱉으면 공감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하직원이나 동료들 사이에서 이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경영진의 친위대에 속하는 인사팀,총무팀,비서실 등에 맞서는 홍길동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평소 업무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러한 비판정신까지 겸비하면 진정한 '까도남(까칠한 도시남자)'으로 대접받는다.
◆신선한 '빅마우스'의 역할도
실제로 이들의 목소리는 사내 시스템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직장 탈레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는 사내 '정보통'이라는 점.사내 파벌과 인맥,임직원에 대한 평가 등을 꿰뚫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술자리 등에서 다양한 회사 정보를 교환하다보니 사내 B급 정보와 루머의 포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때문에 홍보팀,영업팀 등 주로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직원들은 이들에게 밥을 사며 사내 정보를 업데이트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직장 탈레반의 증가는 최근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확산과 무관치 않다"고 설명한다. 온라인 등을 통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젊은 직원들이 늘면서 이 같은 불만의 목소리도 주목받게 됐다.
경영진의 자세도 '일벌백계'식의 과거 양상과는 달라지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들이 직접 게시판에 댓글을 쓰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소통하는 경우도 늘었다. 한 중견기업 사장은 "직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인지 여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경봉/유창재/노경목/조재희/강유현/강경민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