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삼청동과 효자동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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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가 유동인구 끌어모아
개발 제한이 가져온 뜻밖의 축복
개발 제한이 가져온 뜻밖의 축복
서울 종로구 삼청동은 1990년대까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광화문에서 차로 5분,걸어도 15분 거리밖에 안되는 곳인데도 평일 낮엔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한적했다. 서울 전역이 재개발 열기에 휩쓸려 있는 동안에도 이곳만은 세월이 비껴간 듯 낡고 오래 된 집들이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데다 가까이 가기엔 왠지 꺼림칙한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던 탓이다. 광화문 혹은 안국동 쪽에서 삼청동으로 가려면 사간동을 지나 소격동을 거쳐야 하는데 중간에 국군 기무사가 있었다. 초입에 출판문화회관과 갤러리현대가 자리잡은 지 오래 됐지만 대부분 거기까지 가곤 끝이었다.
어쩌다 그 위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기무사 앞에서 숨을 죽였다. 누가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총검 든 경비병 앞을 지나려면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빨리 걸었다. 그런 다음 청와대 앞길과 국무총리 공관 앞에서 다시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니 적막할 수밖에 없던 삼청동이 지금은 밤낮으로 북적거리는 명소가 됐다.
사람이 모여들면서 카페와 식당,옷가게,액세서리점도 늘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오래된 가옥 사이 길을 걸어다닐 수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전통과 현대,옛것과 새것,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서울을 체험한다. 10년 새 집값도 크게 올라 2001년 3.3㎡당 600만원 하던 곳이 지금은 6000만원을 호가한다는 마당이다.
도심 속 섬 같던 이곳이 이처럼 부흥한 데엔 미술인들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후반 인사동 집값이 오르자 화랑들이 상대적으로 값이 싼 이 지역으로 옮기면서 인사동과 북촌 삼청동을 잇는 문화벨트가 조성됐던 것이다. 개발 제한과 한옥보존지구 영향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소외됐던 게 뜻밖의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청와대 앞길 개방과 국군 기무사 이전이 기름을 부은 것도 물론이다. 숨 죽이고 걸을 일이 없어진 까닭이다. 가회동 계동 재동 등 북촌 한옥마을에 젊은층이 늘어난 게 한 요인이란 해석도 있다. 바람이란 일단 불면 번지게 마련인 걸까.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진 문화예술 거리는 효자동 등 서촌 일대까지 늘어났다.
효자동과 통의동 창성동 누상 · 누하동 옥인동 청운동 등 서촌(경복궁 서쪽 마을) 역시 광화문과 지척간이면서도 유동인구가 없던 곳이었다. 청와대 옆이란 사실이 주는 묘한 위압감 탓이었다. 그러던 게 청와대 앞 길이 개방되고 화랑과 북카페,디자인사무실 등이 들어서면서 인사동과 삼청동 못지않은 문화예술 명소로 떴다.
효자동 일대는 고층건물이라곤 찾아보기 힘든,고즈넉한 옛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거리다. 198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계속된 강남 개발 바람 속에서 완전히 내쳐졌던 강북,특히 삼청동과 효자동이 뜬 건 문화와 역사의 힘이다. 한때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으로 옮겨갔던 화랑들이 집값 비싸고 걸어다니기 힘든 강남을 떠나 강북으로 되돌아온 데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역과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효자동과 통의동 쪽으로도 인구가 유입된 것이다.
삼청동과 효자동의 가게는 강남의 명품점처럼 크고 휘황찬란하지 않다. 화랑은 물론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까지 누구든 부담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효자동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시장 손님도 늘었을 것이다. 이곳 역시 재개발했으면 여름엔 우산 속에서 도란도란거리고 가을엔 낙엽,겨울엔 눈을 밟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삼청동과 효자동의 부흥은 옛건물은 무조건 죄다 흔적 없이 허물고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로 바꿔 짓는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삼청동에서 효자동으로 이어진 문화예술 거리가 청운터널 건너편 부암동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하거니와 이런 일이 강북 곳곳으로 번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럼 재개발로 터전을 잃는 이들도 줄어들 테니.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데다 가까이 가기엔 왠지 꺼림칙한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던 탓이다. 광화문 혹은 안국동 쪽에서 삼청동으로 가려면 사간동을 지나 소격동을 거쳐야 하는데 중간에 국군 기무사가 있었다. 초입에 출판문화회관과 갤러리현대가 자리잡은 지 오래 됐지만 대부분 거기까지 가곤 끝이었다.
어쩌다 그 위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기무사 앞에서 숨을 죽였다. 누가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총검 든 경비병 앞을 지나려면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빨리 걸었다. 그런 다음 청와대 앞길과 국무총리 공관 앞에서 다시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니 적막할 수밖에 없던 삼청동이 지금은 밤낮으로 북적거리는 명소가 됐다.
사람이 모여들면서 카페와 식당,옷가게,액세서리점도 늘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오래된 가옥 사이 길을 걸어다닐 수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전통과 현대,옛것과 새것,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서울을 체험한다. 10년 새 집값도 크게 올라 2001년 3.3㎡당 600만원 하던 곳이 지금은 6000만원을 호가한다는 마당이다.
도심 속 섬 같던 이곳이 이처럼 부흥한 데엔 미술인들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후반 인사동 집값이 오르자 화랑들이 상대적으로 값이 싼 이 지역으로 옮기면서 인사동과 북촌 삼청동을 잇는 문화벨트가 조성됐던 것이다. 개발 제한과 한옥보존지구 영향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소외됐던 게 뜻밖의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청와대 앞길 개방과 국군 기무사 이전이 기름을 부은 것도 물론이다. 숨 죽이고 걸을 일이 없어진 까닭이다. 가회동 계동 재동 등 북촌 한옥마을에 젊은층이 늘어난 게 한 요인이란 해석도 있다. 바람이란 일단 불면 번지게 마련인 걸까.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진 문화예술 거리는 효자동 등 서촌 일대까지 늘어났다.
효자동과 통의동 창성동 누상 · 누하동 옥인동 청운동 등 서촌(경복궁 서쪽 마을) 역시 광화문과 지척간이면서도 유동인구가 없던 곳이었다. 청와대 옆이란 사실이 주는 묘한 위압감 탓이었다. 그러던 게 청와대 앞 길이 개방되고 화랑과 북카페,디자인사무실 등이 들어서면서 인사동과 삼청동 못지않은 문화예술 명소로 떴다.
효자동 일대는 고층건물이라곤 찾아보기 힘든,고즈넉한 옛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거리다. 198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계속된 강남 개발 바람 속에서 완전히 내쳐졌던 강북,특히 삼청동과 효자동이 뜬 건 문화와 역사의 힘이다. 한때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으로 옮겨갔던 화랑들이 집값 비싸고 걸어다니기 힘든 강남을 떠나 강북으로 되돌아온 데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역과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효자동과 통의동 쪽으로도 인구가 유입된 것이다.
삼청동과 효자동의 가게는 강남의 명품점처럼 크고 휘황찬란하지 않다. 화랑은 물론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까지 누구든 부담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 있다. 효자동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시장 손님도 늘었을 것이다. 이곳 역시 재개발했으면 여름엔 우산 속에서 도란도란거리고 가을엔 낙엽,겨울엔 눈을 밟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삼청동과 효자동의 부흥은 옛건물은 무조건 죄다 흔적 없이 허물고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로 바꿔 짓는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삼청동에서 효자동으로 이어진 문화예술 거리가 청운터널 건너편 부암동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하거니와 이런 일이 강북 곳곳으로 번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럼 재개발로 터전을 잃는 이들도 줄어들 테니.
박성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