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서 세간의 예측을 뒤엎고 대통령직 사퇴를 거부하면서 이집트 정국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있던 시위대는 격노했고,무바라크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도 강화되고 있다. 이집트 정국의 향배를 가늠할 군부가 그간의 중립적 입장에서 벗어나 무바라크에게 등을 돌리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제기된다.

◆국민감정만 자극한 사퇴 거부

무바라크 대통령은 10일 국영TV로 생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외부 강권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시위대의 즉각사퇴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최측근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겠다"며 "대선이 치러지는 9월까지 평화적인 권력이양 조치를 밟아나가겠다"고 못 박았다. 이를 두고 사메 쇼우크리 미국 주재 이집트 대사는 "모든 권력을 이양받은 술레이만 부통령이 '사실상의 대통령'이 되며,무바라크는 '법적인 국가수반'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바라크는 또 발효된 지 30년된 비상계엄령도 국가의 안보상황이 안정되면 해제하겠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폐지 시점을 밝히진 않았다.

이 같은 발표는 "무바라크가 즉각 사임을 공식발표할 것"이라는 예측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다. 또 무바라크의 조건 없는 퇴진과 즉각적인 계엄 폐지 등 시위대의 핵심요구와도 거리가 있다. 뉴욕타임스는 "무바라크의 사퇴 거부에 타흐리르 광장 시위대가 분노했다"며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시위대는 잇따라'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보도했다. 독일 한델스블라트도 "사퇴 거부는 국민감정만 자극한 무바라크의 악수"라고 분석했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있는 주요 단체들은 11일 금요 예배 뒤 타흐리르 광장으로 행진하는 '100만명 항의 시위'를 열고 대통령궁으로 행진을 감행할 계획이다.

◆군부 무바라크에 등 돌리나

사태가 격화되는 가운데 그동안 중립적 입장을 취하던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와 거리를 두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군부는 이날 무바라크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에 앞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국가를 수호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앞서 사미 하페즈 에난 중장과 하산 알 로에이니 카이로 방어사령관 등은 타흐리르 광장을 방문,"시위대의 요구가 충족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대국민 연설 몇 시간 전엔 모하메드 탄타위 국방장관이 주재하고 20여명의 군 장성이 무바라크와 술레이만 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최고지휘관회의를 갖고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최고지휘관회의는 중동전이 한창이던 1967년과 1973년에 이어 세 번째로 열렸다. 나빌 압둘 파타 카이로알아흐람 정치전략센터 연구원은 "무바라크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는 것은 군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타임스는 "군부가 무바라크와 결별 준비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AP통신도 "무바라크가 즉각 퇴진을 거부함에 따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윌리엄 콴트 미 버지니아대 교수는 "군부가 무바라크와 함께 몰락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야당 지도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무바라크 연설 직후 "이집트 사회는 곧 폭발할 것" 이라며 "군부가 당장 나서서 이집트를 구해야 한다"고 군부의 행동변화를 촉구했다. 시위대는 군부의 동참을 요구하고 있지만 "군부가 아닌 민간인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것엔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김동욱/강경민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