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40대 이후 국민들은 급속한 고령화 속에서 취약한 노후 준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부모를 부양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녀에게 부양받기 어려운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교육비와 결혼비용에 거액을 지출하면서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노인 인구로 인해 복지 지출이 늘어나고 정부 세수가 크게 줄어들 예정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해법 마련도 쉽지 않다.

게다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은퇴 설계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충분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노후설계를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여야 비로소 실천할 수 있다. 빠른 시간 안에 한국적인 현실에 적합한 노후설계를 모색해야 한다. 연금제도가 취약한 탓에 노후생활비 준비를 서둘러야 하며 큰 비용이 들어가는 자녀 학자금이나 결혼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을 자녀와 협의해야 한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빨리 버리고 합리적인 자산관리에 나서야 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후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은퇴문화도 빨리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돈이 많든 적든 행복한 제2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은퇴생활 1막,활동기

김 부장(50)은 은퇴 후에 마음에 드는 친구들과 같이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한다. 다섯 가족이 모이면 오붓한 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벌써 뜻을 같이하는 두 명의 친구와 서울 근교를 다니며 전원주택을 지을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은퇴생활이 4단계로 이뤄진다는 전문가의 설명에 자신의 계획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즉 전원에서의 집단생활은 70대 후반부터 시작되는 간병기에 병원 근처로 이동하는 구성원 때문에 공동체가 깨질 수 있으며 남편들보다 10년 정도 더 사는 부인들의 노후생활에도 맞지 않는다는 한계점을 발견한 것이다.

은퇴란 경제적인 소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직장을 수시로 그만두는 퇴직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은퇴 후부터 활력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70대 중반까지를 활동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60세를 은퇴 시점으로 가정한다면 60세부터 약 75세까지를 활동기라고 한다. 이때를 외국에서는 달리는 시기(Go-Go Years)라고 할 만큼 정열적으로 많은 움직임을 보이는 시기다. 활동기에는 그동안 일하느라 미뤄왔던 국내외 여행이나 골프 취미활동 등을 활발하게 한다. 일생 동안의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맘껏 은퇴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은퇴생활 중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지출하며 은퇴 후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10년 이상 이런 시기가 지속된다.

활동기는 은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활동기를 잘 지내야 노후생활을 멋지게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완전히 은퇴하면 인생 자체가 지루해지고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은퇴 후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면 일찍 늙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은퇴 후에도 계속 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 일을 완전히 그만두기보다는 근로와 은퇴생활을 병행하는 절반만 은퇴하기,은퇴 전부터 서서히 근로를 줄이는 점진적으로 은퇴하기,은퇴 후 교육을 다시 받거나 전문 자격증을 취득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제2의 인생살기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좋은 대안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한다.

◆은퇴생활 2막,회고기

은퇴생활 2막은 70대 중반부터 찾아오는 시기로 이를 '회고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대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근처에 주거를 정하거나 기온이 온화한 곳이나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으로 이사하기도 한다. 여전히 건강은 좋지만 활동이 줄어들기 때문에 은퇴 기간 중 생활비가 가장 적게 든다.

회고기는 건강은 여전히 좋은 상태지만 활동기 때와 달리 서서히 행동이 느려지면서 인생을 돌아보는 단계다. 이때는 생활비가 다른 은퇴 시기보다 적게 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은퇴자금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친구가 지나치게 줄어들거나 사회와 교류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상당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단체나 사회봉사단체를 통한 봉사활동을 더욱 원하며 자신보다 활동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에 대한 봉사도 활발히 한다.

◆은퇴생활 3막,남편 간병기

은퇴생활 세 번째 단계인 3막은 70대 후반이나 80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간병기다. 간병기에는 상당수 노인들이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뇌졸중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에 걸려 다른 사람의 간호를 필요로 한다. 우리 문화는 집에서 사망하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사망하는 것을 객사라고 할 정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비좁고 외로운 아파트나 단독주택에서 전문적인 간호 서비스 없이 사망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한적한 중소도시까지 요양시설이 늘어날 정도로 우리의 노인문화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좋은 요양 서비스를 받거나 의료비를 많이 지출하게 되면 그만큼 노후생활비가 늘어난다. 은퇴 준비가 얼마나 잘 이뤄져서 충분한 자금과 병원비를 마련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시기다. 그래서 은퇴생활비를 추정할 때 생략하기 쉬운 간호기 간병 비용이나 의료비용을 금융자산으로 준비해야 한다.

◆은퇴생활 4막,부인 홀로 생존기

일반적으로 남편 사망 후 부인은 홀로 10년을 더 생존한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평균수명이 6세 정도 길기 때문에 남편이 부인보다 2~3살 많은 경우 부인은 남편 사망 후 약 8~9년을 추가로 생존한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부부가 생활하던 집에서 외로운 삶을 살고 부부가 쓰던 노후생활비의 60% 이상의 비용을 사용한다. 더구나 부인 역시 질병에 시달리거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상당한 의료비나 간병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그동안 남성 위주의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부인의 홀로 생존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과거처럼 자녀 집에 들어가서 수발을 받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 대비책이 절실하다. 남편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훌륭했다 하더라도 남편 사망 후 부인이 극빈층으로 전락하거나 자녀들의 박해를 받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고령화 시대에 여성 빈곤화 현상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은퇴 후 생활상이 한 가지가 아니라 4가지 생활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고령화 시대를 맞이해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냉철한 은퇴설계를 해야 한다. 자신의 자산과 부채를 분석하고 수입과 지출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은퇴생활상을 결정하고 연금과 의료비를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녀에 대한 지출이나 관계를 합리적으로 정하고 종교 · 봉사 · 취미생활을 좀 더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은퇴를 축복으로 바꾸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다가 만족하면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종합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행복한 은퇴란 소박하지만 밝은 희망으로 잘 준비된 계획에 의해 얻어진다. 세상에 태어나기는 쉬워도 품위있게 물러나기는 정말 어려운 법이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jaeryong.woo@sam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