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순간적인 판단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전쟁이라는 국가의 중대사가 생기면 더욱 냉철하고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지혜가 요구된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고집과 오만에 의해 주위의 대사를 그르치고 파국으로 이끈 예는 적지 않다.

《사기》의 '염파인상여열전'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했다. 혜문왕이 죽은 지 7년이 지났을 때 진나라와 조나라 군대가 장평에서 대치했다. 이때 조사(趙奢)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위독했다. 그래서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치도록 했다. 진나라 군대가 자주 조나라 군대를 깨뜨렸지만 조나라 군대는 보루의 벽만 튼튼히 할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가 자주 싸움을 걸어와도 염파는 맞아 싸우지 않았다.

이때 조나라 왕은 진나라 첩자가 퍼뜨린 말을 듣고 믿게 됐는데 그 말은 이러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마복군(馬服君 · 조나라의 명장인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군이 되는 일뿐이다. " 그래서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는 명성만 믿고 조괄을 쓰시려 하는데,이는 거문고의 괘를 아교로 붙여서 고정시키고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자기 아버지가 남긴 병법 책을 읽었을 뿐 사태 변화에 대처할 줄은 모릅니다. "

그러나 조나라 왕은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조괄은 어릴 적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자만했다. 일찍이 그는 아버지 조사와 함께 군사적인 일을 토론한 적이 있는데,조사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가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거요. 그런데 괄이란 놈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오.조나라가 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장군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대는 파멸당할 것이오."

조괄이 떠나려고 할 때 그 어머니는 남편의 말이 생각나 왕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해괴한 생각이 든 왕이 무슨 이유냐고 묻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괄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해 우러러 보는 이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왕은 이미 결정됐다며 간언을 일축했다. 그러자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혹 실패하더라도 연좌제를 묻지 말아 달라며 왕의 결정을 돌리고자 했으나 허사였다.

조괄은 염파를 대신하게 되자 군령을 모두 바꾸고 군대의 벼슬아치를 모조리 교체했다. 진나라 장군 백기가 이 소식을 듣고 기병을 보내 거짓으로 달아나는 척하면서 조나라 군대의 식량 운송로를 끊고 조나라 군대를 둘로 나뉘게 했다. 병졸들의 마음은 조괄에게서 떠나갔다. 40여 일이 지나자 조나라 군사들은 굶어 죽어갔다. 조괄이 정예부대를 앞세우고 직접 싸우러 나갔지만 진나라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조나라 군대는 싸움에서 지고 수십만명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는 이들을 모두 땅에 묻어 죽였다. 조나라가 이 싸움을 전후로 잃은 군사는 45만명이나 됐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