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세계탁구대회가 열린 일본 나고야.대표팀 버스를 놓쳐 발을 구르는 글렌 코완 선수(미국)에게 좡쩌둥(莊則棟)이라는 중국 선수가 손짓했다. 중국팀 버스에 올라탄 코완은 좡과 친구가 됐다. 둘이 찍은 사진을 본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 탁구팀을 초청했다. 미 · 중 간 적대관계의 해빙을 예고한 핑퐁외교의 시작이었다.

핑퐁외교 첫해 비밀 방중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에게 마오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초청했고,닉슨은 1972년 미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미국은 중국을 '공산주의 독재국가'로,중국은 미국을 '자본주의 침략국가'로 보던 양국 관계의 빙하기에 봄이 찾아든 것이다.

1979년 1월 중국의 1인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방미,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만나 국교를 수립했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봄과 겨울을 번갈아 맞이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반중 여론이 거세지면서 미국은 대중 무기수출과 고위급 교류를 중단하기도 했다. 중국 인권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국무차관을 비밀리에 중국에 보내는 등 대화채널은 유지했다.

1996년 대만해협 위기로 양국 관계는 더욱 얼어붙었지만 1997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방미로 협력 분위기가 조성됐다. 양국 관계는 2001년 미국 정찰기가 중국 전투기와 충돌한 사건으로 다시 악화됐다. 그러던 미 · 중 관계에 다시 봄이 들게 만든 건 2001년 9 · 11 테러였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협조가 필요했고 일당 독재를 위해 소수민족의 테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국은 미국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 대선과 총선 때 '중국 때리기'가 적극 활용된 것도 양국 관계가 냉 · 온탕을 오가게 된 배경이다. 빌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 도전했을 때만 해도 "중국에 밀사를 보내 톈안먼에서 민주주의를 짓밟은 자들과 축배를 들게 했다"며 조지 부시 대통령을 공격했지만 1998년엔 본인 스스로 중국을 방문,양국 관계 회복에 일조했다. 조지 W 부시도 2000년 대통령이 되기 전 대선 캠페인 때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라고 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중국은 '전략적 경쟁자'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역시 2002년 중국을 방문해서는 "풍요와 자유를 향한 중국의 역사적 전환에 미국은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11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위안화 절상과 인권 등 여러 이견을 남겨둔 채 협력을 강조하는 선에 머물렀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은 내년 대선에서 연임을 노리고 있다. 내년에 최고 권력에서 물러나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미국에 크게 양보하지 않고 당당하게 관계를 맺는 모습을 중국 인민들에게 과시하고자 한다(로이터통신).핑퐁외교 40년,양국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갈지 주목된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