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말에 이르러 진나라는 강력한 변법과 법치를 내세워 독존체제를 구축하고 천하통일을 위한 고지로 내닫고 있었다. 진나라 동쪽에 있던 여섯 나라가 저마다 쇠약해지는 국력에 초조해하면서 진나라와 손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와중에 조나라에는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이 나와 진나라의 오만방자함을 일시나마 잠재우고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조나라 혜문왕은 어느 날 초나라의 보물 화씨벽(和氏璧)을 손에 넣게 된다. 그것이 혜문왕의 손에 들어온 것이 화근의 씨앗이었다. 마침 진나라 소공(昭公)은 강력한 국방력을 내세워 빼앗은 진나라 성 열다섯 개와 화씨벽을 맞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혜문왕이 대장군 염파를 비롯한 대신들과 상의했더니 이런 의견이 나왔다. 화씨벽을 주자니 진나라에 성을 되돌려받지 못할 것이고,주지 않자니 이것을 빌미로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환관의 우두머리격인 무현(繆賢)이 자신의 사인(舍人)인 인상여를 사신으로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혜문왕은 다음과 같은 인상여의 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진나라가 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화씨벽을 달라고 했는데,조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라에서 화씨벽을 보내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조나라에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 있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대책을 비교해볼 때 차라리 요구를 받아들여 잘못의 책임을 진나라에 덮어 씌우는 편이 낫습니다. "(《사기》 '염파인상여열전')

혜문왕은 임시방편으로 인상여를 파견해 진나라의 오판을 막기로 했다. 진나라에 도착한 인상여가 화씨벽을 바치자 진왕은 기뻐하며 신하와 비빈들에게 차례대로 돌려가며 화씨벽을 만져보게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본 인상여는 진왕이 화씨벽을 돌려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상여는 기지를 발휘해 구슬에 작은 흠이 있다며 구슬을 냉큼 취하고는 궁궐 기둥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이 치솟아 관을 찌를 만큼 화를 내며 진왕에게 일갈했다.

"조나라 신하들이 화씨벽 내주기를 저어하자 제가 말했습니다. '일반 백성의 사귐에도 서로 숙이지 않거늘 큰 나라끼리 사귀는데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조나라 왕은 닷새 동안 재계(齋戒)한 뒤 신을 보낸 것입니다. 큰 나라의 위엄을 존중해 존경하는 마음을 다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신을 별궁에서 만나고 하찮게 여기며 거만하십니다. 그리고 화씨벽을 받으시고는 비빈들에게 차례로 건네주면서 신을 희롱했습니다. 신은 왕이 조나라에 성을 내줄 마음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만일 신을 협박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깨질 것입니다. "

인상여의 기백에 놀란 진왕은 주위 사람들에게 성 열다섯 개를 주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나 인상여는 이 말 역시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진왕에게 닷새 동안 재계하고 구빈(九賓)의 예를 행해야만 그 말을 믿겠노라고 말했다. 그제야 진왕은 화씨벽을 손아귀에 넣을 수 없음을 알고는 인상여를 닷새 동안 잘 대우해 줬다.

닷새가 지나자 인상여는 태연히 진왕에게 가서 화씨벽은 이미 조나라에 몰래 보내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진나라 신하들은 허탈해하는 자도 있었고,어떤 자들은 인상여를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고도 했다. 진왕은 조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분을 삭이며 인상여를 예우하고 조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했다.

조나라로 돌아온 인상여는 상대부(上大夫)가 됐다. 하루아침에 환관의 사인에서 지위가 수직 상승한 것이었다. 다른 신하들이 후환을 두려워했으나 진나라는 끝내 조나라에 성을 내주지 않았고 조나라도 화씨벽을 진나라에 주지 않았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 조나라는 명분도 세우고 자존심도 지켰으니,진나라는 확실한 판정패였던 것이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