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폭탄주와 애빌린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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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건을 반으로 접어서 깐다. 그 위에 맥주잔과 소주잔을 가지런히 올린다. 소주잔 50% 정도를 소주로 채운다. 맥주잔에도 맥주를 마찬가지로 따른다. 소주잔을 맥주잔에 퐁당.원자폭탄 버섯구름 같은 하얀 거품이 일어난다. 다같이 원샷.
연말 송년회에 으레 등장하는 폭탄주.그 시작은 1900년대 미국 탄광과 부두,제철공장 등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신 것부터라 한다.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기 위한 술'이라는 뜻으로 당시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 정치 · 법조 · 언론계 인사들이 많이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음주문화로 자리잡게 됐다.
폭탄주라는 게 참 묘하다. 낯선 만남에도 5~6잔 정도 들이켜면 대화가 술술 풀린다. 소주나 양주를 맥주에다 씻어 먹는 격이니 '목넘김'도 부드럽다. 싼 값으로 술 기운을 빨리 느끼니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참석자들 간 은근히 기싸움이 시작되면 폭음의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 애주가든 아니든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마셔야 하기 때문에 폭탄주 회식은 때로 공포가 되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모두가 후회막급이다. "너 때문이야!"라는 원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폭탄주,꼭 마셔야 할까? 이런 상황에 대해 미국 경영학자 하비는 재미있는 경험담을 소개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미국 텍사스주 콜맨시.하비의 가족은 도미노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장인이 "우리 스테이크 잘하는 애빌린시에 가서 저녁 먹을까?"라고 제안했다. 아내는 "괜찮은 생각"이라 했고,하비도 80㎞를 운전해 가려면 힘들겠지만 일단 "장모님 가시면"이라고 동감을 표시했다. 장모 역시 "애빌린에 가본 지 꽤 오래됐는데 잘 됐네"라고 답했다.
40도의 여름날.16년 된 고물차 안은 너무 더웠다. 길은 얼마나 험한지 가는 내내 먼지에 콜록거려야 했다. 기대했던 스테이크도 그저 그랬다. 지칠대로 지쳐 다시 집에 돌아오고 나니 어두컴컴한 밤.장모는 "집에 있고 싶었는데 애빌린에 가자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고 투덜거렸다. 하비는 "나도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라 말했고,아내도 "이렇게 더운 날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장인이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그냥 말 꺼내본 것"이라고.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애빌린에 다녀온 셈이다. 유명한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다.
누군가 깃발을 들면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그러나 필요할 때 "No"라고 외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폭탄주 한두 잔 정도,최소한의 잔 부딪힘 정도의 자기 희생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쳇말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동근 <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dglee@korcham.net >
연말 송년회에 으레 등장하는 폭탄주.그 시작은 1900년대 미국 탄광과 부두,제철공장 등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신 것부터라 한다.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기 위한 술'이라는 뜻으로 당시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 정치 · 법조 · 언론계 인사들이 많이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음주문화로 자리잡게 됐다.
폭탄주라는 게 참 묘하다. 낯선 만남에도 5~6잔 정도 들이켜면 대화가 술술 풀린다. 소주나 양주를 맥주에다 씻어 먹는 격이니 '목넘김'도 부드럽다. 싼 값으로 술 기운을 빨리 느끼니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참석자들 간 은근히 기싸움이 시작되면 폭음의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 애주가든 아니든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마셔야 하기 때문에 폭탄주 회식은 때로 공포가 되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모두가 후회막급이다. "너 때문이야!"라는 원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폭탄주,꼭 마셔야 할까? 이런 상황에 대해 미국 경영학자 하비는 재미있는 경험담을 소개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미국 텍사스주 콜맨시.하비의 가족은 도미노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장인이 "우리 스테이크 잘하는 애빌린시에 가서 저녁 먹을까?"라고 제안했다. 아내는 "괜찮은 생각"이라 했고,하비도 80㎞를 운전해 가려면 힘들겠지만 일단 "장모님 가시면"이라고 동감을 표시했다. 장모 역시 "애빌린에 가본 지 꽤 오래됐는데 잘 됐네"라고 답했다.
40도의 여름날.16년 된 고물차 안은 너무 더웠다. 길은 얼마나 험한지 가는 내내 먼지에 콜록거려야 했다. 기대했던 스테이크도 그저 그랬다. 지칠대로 지쳐 다시 집에 돌아오고 나니 어두컴컴한 밤.장모는 "집에 있고 싶었는데 애빌린에 가자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고 투덜거렸다. 하비는 "나도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라 말했고,아내도 "이렇게 더운 날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장인이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그냥 말 꺼내본 것"이라고.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애빌린에 다녀온 셈이다. 유명한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다.
누군가 깃발을 들면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그러나 필요할 때 "No"라고 외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폭탄주 한두 잔 정도,최소한의 잔 부딪힘 정도의 자기 희생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쳇말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동근 <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dglee@korcha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