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 상장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들어가도 될까요?"
"어휴, 제가 애널리스트 그만둔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래도 금융 쪽에 대해서는 백 상무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한가람투자자문의 투자책임자(CIO)를 맡고 있는 백운 상무는 요즘도 금융사에 큰 이슈가 생기면 곳곳에서 전화를 받는다. 주가가 어떻게 움직일지, 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견을 구하는 문의다.

그 만큼 백 상무의 이름은 유명하다. 애널리스트 업계에서는 그를 베스트 애널리스트 1세대로 꼽는다.

◆ 금융업종의 명실상부한 '베스트 애널리스트'

백 상무는 1990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대우경제연구소 산업조사실에서 컨설팅 업무를 담당했다. 1992년부터는 금융담당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다, 1995년에는 삼성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리서치나 애널리스트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1990년대 중반 언론사들이 처음으로 업종별로 애널리스트 순위를 매기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백 상무는 은행, 증권, 보험 부문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그 후 4~5년 동안 확고하게 베스트 자리를 굳히며 명실상부한 금융업종 최고의 애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회사들의 구조조정이 이어지던 때 그는 우리금융 기업공개(IPO), 조흥은행·서울은행 매각, 한미은행 전환사채(CB) 발행 등 굵직한 금융사 딜에 대한 주관사 계약을 모두 따냈다.

"우리금융 IPO를 하면서 설명회를 다닐 때에는 투자자들에게 돌을 맞을 뻔했죠. 지방은행을 100%씩 감자하면서 만든 회사인데, 무슨 그런 쓰레기 같은 회사를 5000억씩이나 가치를 매겨 상장하느냐 하고요."

그렇게 애널리스트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백 상무지만, 펀드매니저가 돼 직접 자산을 운용하고 싶다는 욕심은 항상 있었다.

"애널리스트는 해설자지 선수는 아니더라고요. 시장에서 직접 선수로 뛰고 싶다는 생각에 2~3년간 펀드매니저가 되기 위한 준비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부터 멘토로 삼고 있던 박경민 한가람투자자문 대표이사가 기회가 닿으면 일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해왔다. 그렇게 한가람투자자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2004년이었다.

◆ "펀드매니저는 꿈을 보고 산다"

애널리스트로서 종목을 바라볼 때와 펀드매니저로서 종목을 바라볼 때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펀드매니저는 '꿈'을 보면서 투자해 현실화됐을 때 파는 직업이고, 애널리스트는 '현실적'인 숫자로 기업을 판단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애널리스트들이 주가가 올라야 목표주가와 투자의견도 따라올리는 '뒷북'을 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중공업이 10만원 할 때 들어갔어요. 그때 제가 잡은 목표주가가 40만원이었죠. 당시 애널리스트한테 '현대중공업 얼마까지 오르겠냐'고 물어보니 '15만원 이상은 힘들겠는데요' 하더라고요."

현대중공업 주가는 그 후 55만원까지 치솟았으며, 그는 목표가인 40만원에 주식을 매도해 4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매수 가격에서 20%까지 주가가 떨어지면 대부분 손절매를 한다고 밝혔다. 심할 때에는 10%에서도 로스컷을 한다. 진입가격과 매입가격을 사전에 결정하고 들어갔는데, 보수적인 가격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주가가 떨어진다면 '내가 잘 못 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 상무는 펀드매니저로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자신이 판단한 기업의 본질가치와 시장의 수급상황이 어긋났을 때'라고 밝혔다. 확신을 가지고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공포가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기업의 가치로는 10만원이 바닥이라고 봤는데 물량이 계속 나와서 떨어지면 굉장히 고민이 됩니다. 고점이 20만원이라고 판단했는데 수급이 밀어붙여서 그 이상으로 올라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고요. 그럴 땐 도대체 내가 이 종목을 왜 들고 있나 회의가 들 때도 있죠."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시장을 경험해본 결과 언제나 수급보다 본질가치를 우선해서 판단할 때가 옳았다"고 강조했다.

한경닷컴 김다운 기자 kd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