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국가행사 기록한 의궤…296권 모두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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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되는 외규장각 도서는
미테랑 반환약속 17년 만에 환수
30권은 유일본…학술적 가치 높아
소재파악 안된 나머지 도서 과제
미테랑 반환약속 17년 만에 환수
30권은 유일본…학술적 가치 높아
소재파악 안된 나머지 도서 과제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12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에 사실상 영구 반환키로 합의한 외규장각 도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국보급 문화재다. 양측이 반환에 합의한 도서는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정리 · 기록한 의궤(儀軌) 191종 296권.약탈당한 지 144년,1975년 박병선 박사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도서로 분류된 도서 목록을 발견한 지 35년 만에 귀국한다.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 부속 도서관.약탈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의궤를 비롯한 1000여권의 서적이 있었으며 프랑스군은 이 중 서적 등 349점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환에 합의한 의궤들은 모두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것으로 1992년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 반환을 요구한 지 18년 만에 되찾게 됐다.
반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93년 9월 고속철도 계약을 앞두고 방한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규장각 도서 반환을 약속했지만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에 부딪혀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의궤 가운데 한두 권을 먼저 갖다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따라 갖고 온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상하 2책을 가져왔으나 수행단의 일원으로 온 담당사서가 인도를 거부했다.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야 간신히 1책만 청와대에 전달했을 정도였다.
반환 조건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국은 무조건적 반환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등가교환을 주장했다.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는 대신 한국이 소장한 문화재 중 비슷한 가치를 지닌 것을 달라는 것.약탈당한 문화재를 상호 대여 형식으로 돌려받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우리 문화계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후에도 양측은 반환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이 없었고 문화연대 등 국내 문화단체가 프랑스 행정법원에 낸 반환청구 소송도 기각당했다. 하지만 올 3월 한국 정부가 프랑스에 영구대여를 요청하자 프랑스 측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파리7대학 총장 등 프랑스 지식인들도 '외규장각 도서 반환 지지협회'를 결성하는 등 힘을 보탰다.
이번에 반환되는 도서는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에 돌려준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외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보관 중인 296권으로 모두 원본이며 이 가운데 30권은 유일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의궤는 조선 왕실의 풍속과 생활,경제,행정,건축,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담고 있는 데다 600여년 동안 꾸준히 기록된 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따라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이 반환되면 국내 관련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 교수 시절인 1991년부터 재불 서지학자인 박병선 박사 등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환수운동을 벌여온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5년 단위의 대여갱신 형식으로 반환키로 한 것에 대해 "사실상 돌려주겠다는 것으로,당연히 받아야 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 위원장은 "등가교환 방식을 주장해 온 프랑스가 대여갱신을 택한 것은 법적 문제 등 현실적인 요소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것으로 기록된 349점 가운데 아직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머지 42점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또 약탈당한 문화재를 공식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대여 형식으로 돌려받은 데 대한 학계와 시민단체들의 비난과 반발도 예상된다.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박병선 박사도 "우리 문화재인데도 반환이 아니고 대여방식으로 돌려받기로 합의가 됐다니 너무나 안타깝다"고 밝혔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