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됐던 조선이 100년 뒤인 오늘 전 세계의 중심에 섰다. 지금 서울서 열리고 있는 G20 잔치는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볼 때 더욱 감격적이다.

1세기 전 조선 왕국은 세계사의 지각생이었다. 지각 정도가 아니라 전혀 희망 없는 참담한 나라였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 대통령 디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는 문명개화의 모범생 일본에 조선을 합병해 가르쳐 주라고 당부할 지경이었을까. 1년 전 미국 뉴욕타임스(2009년 12월5일)의 제임스 브래들리 칼럼이 지적한 그대로다. 이 글에서 브래들리는 미국 26대 대통령 루즈벨트가 얼마나 러시아를 미워했고,일본을 좋아했던지를 소개하고 있다. 후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 각 나라들이 문명사회로 발전해 가는 동안 일본은 이들을 지도해 줘야 할 것이라고 부추겼다.

1905년 루즈벨트의 미국 국무부는 '조선'을 없애 '일본' 속에 넣었고,미국의 절대적 지지 속에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아예 식민지로 삼켜 버렸다. 그리하면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집어먹기를 동조해 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중국에서 미국의 야망에 협조해 줄 것이라고 루즈벨트는 기대했다. 하지만 또 다른 루즈벨트(34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 1882~1945)는 30년 뒤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 미국의 기대를 저버린 일본은 만주를 삼키고 중국 본토에 진출,결국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조선이 근대화에 지각한 것은 서양인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서양 사람들은 앞다퉈 동서로 뻗어나갔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이 활약하는 지구상의 대발견 시대가 열렸다. 인도와 동남아를 거쳐 1500년대 초 중국과 일본에 도착한 서양인들은 무역과 함께 기독교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서양인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꼭 3세기가 늦은 1830년대부터였다. 서양에서 기세좋게 발달한 과학기술이 일본과 중국에는 전파되기 시작했지만,조선에는 3세기나 늦게 알려지게 됐다. 당연히 조선인들은 서양문물에 눈뜨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지각 현상을 보인다.

서양 선교사들이 일본 중국보다 3세기 늦게 들어왔으니 서양 지식도 그만큼 늦게 알려지기 시작했고,서양말을 하는 사람도 훨씬 늦게 생겨났다. 일본의 계몽가이자 교육자인 후쿠자와 유키치(1834~1901)가 1862년 런던에서 중국 학자와 만난 기록에는 당시 서양말을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이 중국에 11명,일본에 500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조선에는 서양말을 하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로부터 꼭 21년 뒤 윤치호(1865~1945)가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으니….

주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조선 왕조는 세계에서 고립됐고,그것이 우리 근대사의 비극을 불러왔다. 그런 우리 처지를 루즈벨트와 일본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국익에 따라 마음대로 요리했던 셈이다.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루즈벨트는 러 · 일 전쟁의 중재자 노릇으로 그 이듬해(1906)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 전쟁은 바로 조선 침략의 준비였거늘.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미국의 다른 대통령이 이번에는 우리 대통령을 형제라고 부르며 서울에 왔고,한국의 대통령이 주재하는 G20 정상회의에서 함께 큰 잔치상을 받고 있다. 100년이 지났지만,결국 그들의 잔치는 각자의 국익이 평가의 최종 기준일 수밖에 없다. 알지도 못한 채 강대국의 뒷거래 속에 나라를 빼앗겼던 1세기 전과 달리 우리는 이제 그 주역으로서 세계사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어찌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있는가.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