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요? 아이스크림과 과자 종류만 수백 가지인데 제가 어떻게 다 매깁니까. 그냥 식품업체 직원들이 '이 정도 받으면 된다'고 정해주면 그 가격대로 파는 거죠."

9일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인근 A슈퍼마켓.주인에게 "권장 소비자가격이 없어졌는데 판매가격은 어떻게 매기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매장 한 가운데 놓인 아이스크림 냉장고에는 주인이 직접 쓴 '50% 할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바로 옆 과자 매대에서 고른 C업체의 S과자 겉포장에는 '4.0k'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주인은 "권장가격이 4000원이라는 의미"라며 "제조업체와 소매상만 아는 암호"라고 귀띔했다. 이 가게만의 얘기는 아니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오픈 프라이스(판매업체 자율 가격표시) 제도'가 삐걱거리고 있다. 이 제도는 제조업체가 권장 소비자가격을 표시하는 것을 금지하고,유통업체가 자율적으로 판매가를 매기도록 한 것.원래 500원짜리인 아이스크림에 '권장가격 1000원'이라고 표기한 뒤 50% 할인해주는 척 하는 '눈속임 마케팅'을 근절시키고 유통업체들 간 가격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도입했다.

1999년 TV 세탁기 등을 대상으로 시작한 이 제도가 과자 아이스크림 라면 등으로 확대된 건 지난 7월.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상시적으로 '50% 할인 판매한다'고 써붙이거나,제조업체가 '4.0k'처럼 사실상의 권장가격을 표기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담당부처인 지식경제부는 손을 놓고 있다. 그동안 한 일이라곤 실태조사를 통해 '오픈 프라이스가 잘 안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게 전부다. 제도 정착을 위해 해야 할 홍보 및 계도계획도 마련하지 않았다. 지경부 관계자는 "같은 부서에서 기업형 슈퍼마켓(SSM)과 오픈 프라이스를 다루다보니 뒷전으로 밀린 것"이라며 "안 그래도 SSM 때문에 동네슈퍼들이 아우성 인데 오픈 프라이스를 안 지킨다고 과태료를 물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조 및 유통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제도'라고 했던 오픈 프라이스는 정부의 무(無)대책과 제조 · 유통업체의 무관심 속에서 '안 지켜도 그만인 제도'로 서서히 바뀌고 있다.

오상헌 생활경제부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