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울산광역시 온산읍에 있는 무림P&P 공장을 국내외 제지회사 최고경영자(CEO) 20여명이 찾았다. 전날(10월28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 펄프 · 제지산업 회의'에 참석했던 CEO들이 바쁜 일정을 쪼개 무림P&P 울산공장을 찾은 이유는 이곳이 국내를 포함해 아시아 지역 제지업계 판도를 바꿀 '태풍의 핵'이기 때문이다.

내년 5월에 양산을 시작하는 이 공장은 국내 최초의 '펄프-제지 일관화 공장'.해외에서 건조 상태의 펄프를 들여와 종이를 만드는 기존 국내 제지공장과 달리 무림P&P 공장은 '반죽' 상태의 생(生)펄프를 이용해 종이를 만든다. 기존 공장에 비해 생산단가를 15% 이상 낮출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국내 경쟁사들로서는 내년부터 치열한 원가 경쟁을 벌여야 하는 부담을 안는 셈이다. 미국 유럽 시장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과 일본 제지회사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이 때문에 이날 울산공장을 찾은 국내외 제지회사 CEO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다는 후문이다.

무림P&P가 국내 제지업계 판도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작년 11월 5000억원을 들여 '펄프-제지 일관화 공장'을 신축하면서 보수적인 제지업계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새 공장의 생산물량이 연간 45만t으로 국내 인쇄용지 출하량의 4분의 1에 달하는 데다 생산단가를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다. 업계에서 "무림P&P 일관화 공장이 중소 제지업계 구조조정을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최초 일관화 공장

무림P&P는 2008년 4월 무림페이퍼에서 인수한 동해펄프가 이름을 바꾼 회사다. 국내 유일의 펄프 회사로 현재 국내 펄프 수요량의 20%(연 42만5000t)를 공급하고 있다. 독점적인 펄프 공급만으로 충분히 수익성을 낼 수 있음에도 무림P&P가 일관화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통할 품질 ·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김인중 무림P&P 대표는 "선진국 제지회사들은 대부분 일관화 공장을 가동하는 데 비해 국내 제지회사들은 그렇지 못했다"며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내 제지회사의 기존 공장과 무림P&P가 만드는 일관화 공장을 비교하면 경쟁력 차이는 뚜렷하다. 기존 제지공장은 해외 펄프회사들이 만든 건조펄프를 수입해 액체 상태로 만들고,이를 다시 건조시켜 얇은 종이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때문에 펄프를 수입해 들여오는 운송비와 펄프 건조에 필요한 스팀(수증기)비용 등이 고정적으로 들어간다. 이에 비해 무림P&P의 일관화 공장은 '우드칩(목재를 잘게 쪼갠 것)'을 녹여 만든 액체 상태의 생펄프를 파이프를 통해 제지 라인으로 바로 보내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운송비와 스팀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김지효 HMC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운송비와 스팀비 절감분을 감안하면 무림P&P 일관화 공장은 기존 제지공장에 비해 15% 이상 원가를 낮출 수 있다"며 "가격으로 따지면 t당 10만원 싸게 인쇄용지를 만들 수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무림P&P 관계자는 "펄프를 건조시켰다가 다시 액체 상태로 만드는 기존 방식에 비해 일관화 공정에서 생산하는 종이는 목재의 섬유소가 파괴되지 않아 질도 좋다"고 설명했다.

◆제지업계 '태풍의 핵'

무림P&P는 일관화 공장을 내년 3월 시험 가동한 뒤 5월부터 상업생산을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연간 생산목표는 인쇄용 백상지와 고급 인쇄용지인 아트지를 합쳐 총 45만t.국내 인쇄용지 내수 출하량(연 200만t)의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다. 김 대표는 "지금은 펄프만 만들고 있지만 일관화 공장이 본격 가동하면 내년에만 3000억원가량의 추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일관화 공장 준공 이후 펄프 생산량을 42만5000t에서 20만~23만t가량으로 줄이면서 펄프 분야 매출(2010년 예상치는 3300억원)은 '반토막' 나겠지만 제지 분야에서만 4500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무림P&P의 일관화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 무림그룹은 무림페이퍼(연산 60만t)와 무림SP(연산 8만t) 등을 합쳐 총 113만t의 생산 규모를 갖춘다. 한솔그룹 계열인 한솔제지와 아트원제지의 생산 규모(130만t)에 버금가는 수준이며 제지업계 3위인 한국제지(연산 60만t)를 훨씬 능가하게 된다. 국내 제지업계의 판도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아울러 무림P&P 공장 가동은 업계 간 '가격 경쟁'을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사들보다 훨씬 싸게 인쇄용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 관계자는 "한솔제지 한국제지 등 메이저 업체는 물론 중소 제지회사들도 상당한 원가 인하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007~2008년 수익성 악화로 중소 제지업체들이 잇따라 공장을 폐쇄했던 1차 구조조정에 이어 제2의 구조조정을 불러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해외 업체들과 경쟁 나선다

업계는 일관화 공장에 대한 공격적 투자가 성공할지 여부는 해외 시장 공략에 달려 있다고 분석한다. 국내 인쇄용지 시장이 이미 공급 초과인 상태에서 내수 시장을 공략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다. 무림P&P도 일관화 공장 가동에 맞춰 해외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일관화 공장에서 생산하는 물량의 55~60% 가량을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 수출할 계획이다. 원가 절감을 통해 중국과 인도네시아산 종이와도 가격 경쟁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김 대표는 "이미 미국,영국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으며 홍콩 중동 등에도 사무소를 설치했다"며 "가격이 비슷하다면 생산기술이 더 좋은 우리 제품을 선택하는 고객들이 많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무림P&P는 아울러 원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펄프의 원료인 '우드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대표적 목재 생산 지역인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에 대규모 조림(造林)지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무림P&P 관계자는 "해외 조림지를 확보하면 목재-펄프-종이로 이어지는 제지 분야 수직 계열화를 완성할 수 있게 돼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