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희끗해도 한번 밴드부는 영원한 밴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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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110주년 기념공연 앞둔 경기시니어앙상블
뱃고동 같은 튜바 소리 위로 황금빛 찬란한 트럼펫 멜로디가 흐른다. 여기에 감미로운 클라리넷과 호른 트롬본 소리가 곁들여진다. 탱고의 거장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과 '리베르 탱고'다. 그 뒤엔 쿵짝짝 쿵짝짝 드럼 소리와 함께 '다뉴브 왈츠'가 연주된다.
지난 16일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민회관.경기고 밴드부 출신이 중심이 된 '경기시니어앙상블'의 연습이 한창이다. 주력 단원들의 연령은 60~70대.머리엔 서리가 내렸어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20~30대 뮤지션보다 뜨겁다. 총 멤버는 약 70명.
군기도 확실하다. "아~ 연습 전에 커피 한 잔 마시면 안될까. " 65세 선배의 부드러운 주문에 환갑을 넘긴 후배가 군소리 없이 자판기로 달려간다.
지휘자가 단상에 오르자 소란하던 연습실은 일순간 조용해진다. 지휘봉에 맞춰 영화음악이 흐른다. 오드리 헵번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나와 유명해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밤새 춤출 수 있어요'다. 리듬을 타고 연주자들이 춤춘다. 바람에 일렁이는 들풀같다.
경기시니어앙상블에서 활동 중인 단원들의 직업은 기업인 자영업자 교사 법조인 교수 의사 등 다양하다. 부드러운 클라리넷은 경기시니어앙상블 회장인 이수문 상상스페이스 대표와 안한성 안흥상사 회장,김도한 서울대 수학과 교수,최중길 연세대 이과대학장 등이 담당한다. 분위기 있는 색소폰은 권영길 전 롯데항공화물 대표와 서헌제 중앙대 법대 교수가,우아한 플루트는 이필한 하이메트 부회장,황정규 법무법인 주원 대표 변호사(전 서울동부지법 수석부장판사) 몫이다.
금관악기의 제왕 트럼펫은 이순우 전 상사중재원장,임태환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묵직한 유포니움은 김문식 아주대 보건대학원장과 이건상 한양대 교수(전 한양대 부총장),고상한 트롬본은 박세곤 경원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몫이다. 신나게 드럼 스틱을 휘두르는 사람은 이순병 동부건설 대표다.
이수문 회장(62)은 "그간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연습해왔다"며 "11월14일 여의도 KBS홀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 겸 경기고 개교 110주년 기념음악회 준비를 위해 최근 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 땀 흘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경기고 재학시절 연극반과 밴드부에서 활동했고 서울대 공대 재학 중에도 연극반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기업인이면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의 산파역을 맡았다. 뮤지컬 공연 중에는 주말마다 멜빵바지를 입고 예술의전당에서 귀한 손님을 안내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관은 '폼생폼사'.군 복무 중 월남 파병을 자원한 이유도 폼나는 군악대에서 활동하며 맹호부대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있는 회원들 역시 이 회장 못지않게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 음악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트럼펫 주자인 이순우 전 상사중재원장(71)은 서울대 법대에 다닐 때 명 트럼페터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 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행정학 박사와 법학 박사 등 2개의 박사 학위를 땄지만 공부 중에도 트럼펫을 놓은 적이 없다. 그는 아파트 방 한 칸에 아예 방음시설을 했을 정도다.
지휘는 독일 에센폴크방 국립음대를 졸업한 한창수 동문이 맡고 있다. 이번 공연엔 경기고 동문 색소폰 빅밴드 40여명도 찬조 출연한다. 이들은 피아졸라의 망각처럼 시간을 잊고 사는 듯하다. 하긴 그게 음악이 지닌 마력인지도 모르지만.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