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여름,폭풍에 배를 잃은 영국 선원 4명이 구명보트에 탄 채 표류하고 있었다. 보트엔 통조림캔 2개뿐.그나마 8일 만에 바닥났다. 19일째 선장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자고 제의했다. 한 사람이 거부했지만 결국 17세 고아소년을 희생시킨 뒤 24일째 구조됐다.

1972년 10월13일 안데스 산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시합차 칠레로 가던 우루과이 운동선수와 가족이 탄 비행기가 추락한 것.살아남은 이들은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힘겹게 버티지만 9일째 되던 날 비행기에서 찾은 라디오를 통해 구조 중단 뉴스를 듣는다.

살아날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에 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뿐이지만 그러기엔 다들 기운이 너무 없다. 한 사람이 극단적인 방법을 내놓자 대부분 고개를 흔들지만 점차 도리없이 받아들인다. 세 사람이 산을 넘고 마침내 73일 만인 12월23일 16명이 구출된다.

산 사람을 희생시킨 전자와 달리 후자는 비행기 추락 시 사망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고 알려졌고 따라서 아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말하기를 꺼렸고,영화(얼라이브)는 살아남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에 초점을 맞췄다.

8월 5일 사고로 지하 700m에 갇혀 있는 칠레 산호세 광산 광부들에 대한 구조가 임박한 가운데 매몰자들이 저마다 "유 퍼스트(You First)"를 외쳤다는 소식이다. 구조 순서를 상의하자 서로 자기가 마지막까지 남겠다고 자원했다는 것이다.

33명이 모두 나오자면 48시간은 걸린다고 하는 만큼 순번을 뒤로 미루겠다고 나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과 정신력이 다르다지만 한시라도 빨리 나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건 매몰 17일 만에 생존 사실이 알려진 영향이 크지만 생존자들이 강한 연대의식과 동료애를 드러낸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바깥과 연락되는 등 생존 가능성이 확인된 데 따른 현상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렇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위하는 모습은 세계인의 감동을 자아냈다.

막상 순서가 늦어지면 초조하고 무서운 마음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극한상황에서 이들이 보여준 '유 퍼스트 정신'은 무한경쟁을 핑계로 앞뒤 돌아볼 틈 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헐뜯는 이들로 하여금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도록 할 게 틀림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