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원전 업체인 도시바의 미국 워싱턴DC 사무소는 지난 2월 조촐한 자축연을 벌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조지아주 버크카운티 보그틀에 건설하는 신규 원자력 발전소에 80억달러의 대출을 보증하겠다고 발표한 직후다. 1985년 이후 전면 중단한 미국의 원전 건설이 오바마 대통령의 발표 이후 재개될 것이라는 확신에서였다.

도시바는 미국 원전 설계업체인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할 정도로 미국 원전 사업에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미국에 원전을 짓기 위한 필수 관문인 미국 원자력기술규제위원회(NRC) 검증도 올해 안에 받을 전망이다. 한국은 이제야 NRC에 제출할 각종 서류들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신청하고 검증을 받으려면 적어도 3~5년 정도 시간이 걸린다"며 "미국 원전 시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로 일격을 맞은 기존 원전 강국들이 전열을 재정비,역공에 나서고 있다. 일본 프랑스 미국 등의 주요 원전 업체들이 '삼각 동맹'을 맺는 등 강자들끼리의 합종연횡 사례도 빈번하다.

◆전열 정비하는 프랑스와 일본

일본은 총력전에 나서는 양상이다. 김학준 한국수력원자력 도쿄 지사장은 "한국에 UAE 원전을 빼앗긴 게 일본을 자극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울 정도"라며 "원전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경제산업성 주도로 추진하고 있는 '올 재팬(All Japan)' 전략이 일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도시바,히타치,미쓰비시중공업 등 원자로 공급업체 3곳과 도쿄전력 등 10개 전력회사들이 참여하는 연합 기업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말 설립 예정으로 경제산업성은 이치로 다케구로 도쿄전력 원자력담당 부사장을 사장으로 내정했다.

프랑스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프랑스전력공사(EDF)의 프랑수아 루슬리 명예회장이 지난 7월 말 '프랑스 민수용 원자력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실에 제출한 보고서가 UAE 수주 패배 이후 현지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루슬리 회장은 "프랑스는 원자력산업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으나 최근 대외 이미지가 실추됐다"고 자인하며 "정부 주도로 원자력 산업계를 재구축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팀 프랑스(Team France)' 전략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재경 한수원 파리 사무소장은 "국영 전력회사 EDF와 원자로 공급업체 아레바,터빈 공급업체 알스톰 등 각각의 플레이어들이 한 팀을 이뤄 수주전에 나서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EDF가 영국 전력회사이자 원전 발주처인 브리티시에너지(BE)의 지분을 인수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EDF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BE가 신규 원전을 발주할 때 아레바 등 프랑스 기업을 우선 순위에 놓도록 하겠다는 전략이다.

◆겨울잠 깬 미국, 야심 드러내는 러시아

세계 최강의 원자로 설계업체로 꼽히는 웨스팅하우스를 필두로 미국 원전업계도 해외 수출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1985년 이후 미국에 신규 원전이 전무하긴 했지만 110기에 달하는 노후 원전을 관리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엄청나다"며 "웨스팅하우스가 올초 중국 샨먼과 하이양 원전을 수주함으로써 미국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평가했다.

두산중공업이 웨스팅하우스와 장기간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미국 원전 업계의 약진이 한국에 실(失)이라고 판단하긴 어렵지만 잠재 경쟁자가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러시아도 최근 일본을 제치고 베트남 원전을 따내는 등 저력을 보이고 있다. 중국 인도 등에서도 사업권을 따냈다. 황주호 경희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서방 국가에 비우호적인 국가들은 러시아 원전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강자들의 합종연횡도 한국에는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도시바가 2006년 웨스팅하우스를 54억달러에 인수한 이래 미국과 일본은 한 팀처럼 움직일 정도다. 히타치도 GE와 2007년 합작회사를 설립,미국 및 세계 시장 진출에서 협력하고 있다.

프랑스 아레바는 도시바 · 웨스팅하우스 연합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미쓰비시중공업과 공동 전선을 구축,개발도상국에 알맞은 중소형급 원자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스페인 에너지그룹인 이베르드롤라와 제휴,유럽 국가의 원전 건설 입찰에서 협력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러시아 로사톰은 독일 지멘스와 작년 3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황 교수는 "우리는 두산중공업이 웨스팅하우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을 뿐 고립 위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파리/도쿄=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