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에서 불거진 주가수익비율(PER) 실효성 논란이 국내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주가를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PER은 기업 이익에 비해 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가치(주가)가 적정한지 판단하는 전통적인 투자지표다. 국내 전문가들은 "기업이익 개선에도 불구하고 PER이 역사상 저점 수준이어서 상승 추세로의 전환이 머지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 지난달 말 기준 코스피지수의 PER은 2008년 말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8.81배에 그쳤다.

하지만 올 들어 기업 실적 호조가 지속되는데도 PER은 경기 둔화 우려로 하향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내 증시 PER은 다른 나라에 비해 늘 '저평가' 상태이고 실적 전망에 관계없이 줄곧 떨어져,PER이 낮아 주가가 오를 것이란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월스트리트저널도 "불확실성 증가로 수익과 경제 상황에 대한 전망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 PER이 투자지표로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가 부진 때 PER 오히려 낮아져

PER은 기업이익과 주가 흐름 간의 시차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맹점으로 꼽힌다. 요즘처럼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고 실적 추세의 방향성이 꺾이는 시점에는 제대로 된 투자지표로 기능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는 항상 실적에 한 박자 앞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익 전망과 주가의 방향성이 일치할 때는 상관 없지만 향후 이익 감소 우려로 주가가 부진할 때는 PER이 오히려 낮아지는 '착시현상'이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경기 사이클에 민감한 주식은 시장 통념과는 반대로 PER이 높을 때 사서 낮아지기 시작할 때 파는 게 실제로는 더 적합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주가 버블이 생기거나 폭락장이 나타난 뒤에는 주가가 이익 전망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 PER이 쓸모없게 된다는 지적도 있다. 조용현 하나대투증권 투자전략부장은 "역사적으로 PER은 주가가 이익 전망을 넘어서는 강세를 나타낼 때 정점을 친 후 장기간 하락하는 추세를 보인다"며 "지난해 금융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단기 급등이 최근 PER 하락의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이익 전망치 상향 속도가 느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주가 조정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여서 당분간 PER 하락 추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다.

◆EV갭 ROE 등 보조지표 활용해야

주가 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 대체할 만한 투자지표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보조지표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동양종금증권은 이익 전망치의 변화 추세와 주가 움직임의 격차를 표시하는 EV갭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V갭이 높을수록 주가가 기업이익을 적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할인돼 있다는 의미다.

김주형 동양종금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기업실적이 사상 최고치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국내 증시의 EV갭은 2000년 이후 최고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며 "이는 투자자들이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를 과도하게 주가에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시장이 펀더멘털(실적)보다는 심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EV갭이 상대적으로 큰 종목은 향후 투자심리가 안정되면 주가도 제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삼성전기 서울반도체 등 정보기술(IT)주와 성우하이텍 현대차 등 자동차 관련주, 다음 국순당 등 일부 내수 관련주들이 EV갭이 큰 대표적인 종목으로 꼽혔다.

이 센터장은 "향후 경기가 둔화된다고 가정하면 안정적인 실적 추이를 유지할 수 있는 기업들에 주목해야 한다"며 "주가 수준이 낮으면서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수익 안정성이 높은 종목을 골라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지연 기자 serew@hankyung.com

◆ EV갭

Earnings-Valuation gap.12개월 예상 주당순이익(EPS)의 월별 평균과 표준편차를 지수화한 값에서 주가수익비율(PER)을 뺀 수치.기업 이익 전망치의 변동폭에 비해 주가가 얼마나 할인돼 거래되고 있는지를 표시해주는 지표다. 수치가 높을수록 기업이익에 비해 과매도돼 주가가 저평가된 상태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