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전 일이다. 제자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이었다. 환자는 아직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위는 무거웠다. "선생님,저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요. 이번에 나가면 그렇게 안 살 거예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요. " 그리고 그는 3일 뒤 타계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저녁노을을 보았다. 유난히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저녁노을은 하루를 마감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생을 아름답게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접해온 잊을 수 없는 장면과 그 장면속의 사물들이 독특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런 상상 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일이었던 제자의 마지막 모습과 그 말이 제일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침없이 오로지 자신이 정한 목표의 성취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면 당연히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지나친 목표의식이 너무 주위를 돌아보지 않게 해 잃게 되는 인생의 재미는 과연 작은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라도 자주 갈 것을,부모님 계실 때 온 가족 여행이라도 한번 갈 것을,아들 · 딸 졸업식 때 함께했으면 좋았을 것을,가끔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그리며 살 것을,아내에게 좋아한다고 자주 얘기해 줄 것을…. 생각은 생각을 물고 끝없는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렇게 후회하던 사람이 새 삶을 산다 해도 목표지향형이 대부분일 뿐 아니라 목표지향형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에선 조급증 환자로 또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걸음도 빨라야 하고,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아이디어도 빨리 내놔야 하고,외국어도 빨리 익혀야 하고,문제가 발생한 현장에도 빨리 가보고 대책도 빨리 세워야 하고….그러나 이런 조급증 중에는 참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인 동시에 가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사실 지나친 것도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우리의 식사습관을 생각해 보자.적어도 20분 이상은 잡아야 비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점심의 경우 심하면 5분 안에 끝낸다. 우리의 버릇을 알면서도 이제 하나의 스타일로 고착되어 가는 느낌이다. 소화제,변비약,주사제의 남용.심지어는 등산 습관까지도 그렇지 않은가. 자연스레 소화되고 배변되는 그 시간을 참기 어려운 사람들,감기에 걸리면 주사 처방을 오히려 의사에게 요구하는 환자들,자연경관 감상보다 정상 정복에만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다. 이런 분위기가 직장이나 가정이나 사회에 만연하면 안정을 느끼기 어렵다. 늘 경쟁의 노예가 되고 사소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노을이 지면 어둠이 온다. 하루는 불빛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으로 마감된다. 따라서 노을은 마지막 메시지이다.

"저는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요"라고 반복하던 제자의 유언 아닌 유언을 다시 되새겨 본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왜 그 말부터 하고 싶었을까. 여유를 갖지 못한 미완의 생에 대한 탄식이었을까. 어리석은 선생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빨리빨리 기질이 한국의 경제 발전과 정보기술(IT) 강국 건설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해도 이제는 조금씩 자신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고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찾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노을을 보았다. 노을은 불립문자였다. 나는 지금도 어제의 문자들을 곰곰이 해독하고 있다.

이우걸 < 시조시인 >